구현군의 죽음 못 막은 떠들썩한 「장애자의 해」 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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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체 부자유 중학생이 자신의 아픈 현실을 감당키 어려워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지체 부자유로 오는 행동의 불편보다는 친구의 놀림과 교사의 질책 등이 자살요인이 되었던 그의 죽음은 올해가「장애자의 해」라는데 더욱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나 구현군의 비통한 목맨 자살은 많은 행사의 깃발이 얼마나 현실감 없는 허황된 몸짓에 불과했고 다채로운 행사의 물결은 기실 그들과는 별반 상관없는 것으로 나타나 우리를 울적하게 한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죽음을 기웃거리고 있었음을 바라보지 못한 「맹인 사회」를 뼈아프게 지적해 준 사건이다. 그의 자살에 충격을 던져준 문제의 유서와 일기는 이기로 팽배해진 오늘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감각한 가슴깊이에까지 전율 같은 낭패감과 비감을 불러일으켜 대지를 파고드는 회오리 같은 거대한 못이 우리 정신을 질러오는 아픔을 겪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현 군은 갔다. 이제 그에게는 그 어떤 수모도, 고통도, 눈물도 없을 것이다. 6년간이나 업혀 학교를 다녔던 따뜻한 어머니의 등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을 그는 알았을까.
부자유한 몸으로는 대처 못할 고독과 절망.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던 분노까지를 모두 품어 안고 구현 군은 모멸과 학대가 없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간 것이다.
『나는 나무 한 그루 심질 못했다. 언제나 심어볼까. 나무를 심는 사람의 마음은 아마 나무처럼 푸르고 아름답겠지』
비록 보잘것없는 지체부자유아였지만 푸른 나무에 대한 동경과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은 그의 거부의 살갗 안에 뜨거운 피로 흘렀으며 그의 인간애는 오히려 외로움을 알게 하는 고통이 되어 주었을 뿐이었다.
『학교에 도덕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나는 가슴이 설렜다. 나한데 새로운 요구를 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한번쯤 시원하게 축구 볼이라도 차고 싶을 그 나이에, 권투중계를 바라보며 소리를 치고 돌 벽이라도 두 손으로 쳐보고 싶을 그 나이에 선생님이 바뀌어도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구현군의 떨리는 작은 가슴을 우리는 다만 하나의 화제로 떠올렸다가 흘려보내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젖은 눈으로, 원망의 눈으로 세상의 떠들썩함을 지켜보며 울고있다.
건강한 자식의 성적이 좋지 않음을 꾸짖다가 구현군의 죽음으로 이 정도라도 좋다고 순간적으로 위안을 삼는 어른이 있다면 그 또한 구현군의 죽음을 더욱 외롭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의 애절한 아픔을 호소하는 대상이 일기장이 아니고 바로 「나」였어야 한다고 한번쯤 수긍해야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구현군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한다.
따뜻한 친구와 인간적인 애정을 풀어주는 교사와 이웃이 그의 일기장 대신 그의 외로움과 고통을 같이 해 주었다면 아마도 구현 군은 할아버지·할머니·동생을 염려하며 떠나지 않았을 것이며 푸른 나무를 심기 위해 죽음을 미루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구현군의 자살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의 불쌍하고 외로운 영혼이 지금 어딘 가로 멀리 가고있다 해도 무작정 이해의 눈으로 끄덕여서도 안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극기와 현실의 개척을 고통으로 치러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의 어려움을 죽음 전에 깨워 주지 못한 때늦은 후회 감을 구현 군과 같은 장애자에게 들려줌으로써 그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해야 할 것이다.
이 몇 줄의 글이 과연 그의 죽음에 무엇을 보상할 것인지 모는 남은 지체부자유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전달될 것인지 회의를 느끼며 다만 구현군의 비뚤어진 글씨의 유서가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바로잡아 주는 지렛대가 되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진달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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