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초대 시조] 비의 나그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정수자=1984년 세종대왕숭모제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등단. 아주대 문학박사. 시조집 『탐하다』 『허공 우물』 『저녁의 뒷모습』 『저물 녘 길을 떠나다』. 중앙시조대상·현대불교문학상·이영도시조문학상·한국시조대상 등 수상.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이 시를 읽으며 비에 흠뻑 젖고 있을 사람들이 떠오른다.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세상의 비를 우산도 처마도 없이 오달지게 맞고 있을 ‘비의 나그네’들이다. 동음이의어들이 유희를 거듭하며 자유자재로 오르내리고 비판과 풍자가 거침없이 뒤따르는 이 시는 마르고 어두운 세상에 벽력을 내리치는 기세가 가차없다.

 세상의 변방을 지나며 가림막 없는 삶의 날비를 맨몸으로 두들겨 맞는 ‘유민’이자 ‘난민’인 ‘비혼족’에 ‘비정규족’인 그들. 비주류의 ‘비애’를 빛 속에서 응시해야 하는 그들을 끌어안고 왜곡되고 굴절된 시대를 정면으로 꿰뚫는 화자의 눈빛은 ‘비장’하기만 하다. 화자의 ‘메마른 혀끝’이 칼 같은 날빛을 더해 갈 때 세상의 어둠도 언젠가는 제대로 ‘난분분’해지리라. 비(非)의 난장 속에서 정형의 미학을 지켜내는 시인의 도저한 목소리와 내공 또한 비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에서의 계약된 목숨을 하루하루 까먹으면서 살아가는 우리들. 계약 만료일도 저마다 다르지만 누구도 재계약을 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시인의 시는 촛불 속 극점처럼 언제나 뜨겁게 타오르는 차가운 불빛이리라. 박명숙(시조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