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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戰後 국제질서와 한반도 전문가 특별 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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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이라크 전쟁이 사실상 종결됐다.

중앙일보는 19일 홍순영(洪淳瑛) 전 외교통상.통일부 장관과 하용출(河龍出)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김재두(金載斗)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을 초청, 이라크전 이후 국제질서와 한반도 정세를 짚어보는 특별좌담회를 마련했다. 중앙일보의 김영희(金永熙) 대기자가 진행을 맡았다.

김영희=이라크 전쟁이 예상을 깨고 20여일만에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전쟁의 성격부터 짚어볼까요.

홍순영=미국 측에서 보면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수호와 반(反)테러리즘이라는 두가지 명분을 국제사회에 강제적으로 적용한 전쟁입니다. '팍스 아메리카나'실현 의지의 발현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아랍권에서 보면 주권국가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고, 이슬람권에 대한 미국의 적대정책에 불과합니다. 미국은 전쟁의 정당성을 세계에 제시하고 이슬람권의 동조를 얻어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습니다.

하용출=이번 전쟁의 핵심은'예방전쟁'이라는 것입니다. 테러의 가능성을 사전 봉쇄하고, 어떤 나라가 테러리스트와 연계됐다면 민족국가의 단위를 무시하고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독트린입니다.

김영희=예방전쟁이라면 미국은 북한도 전쟁 대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까요.

하용출=예방전쟁의 대상을 정하는 기준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미국이 느끼는 위협의 정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앞으로 예방전쟁의 객관적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가 국제사회의 새로운 과제가 될 겁니다.

김영희=중동지역의 역학 변화가 이미 시작됐습니다. 승자인 미국은 중동질서를 어떻게 재편해갈까요.

김재두=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이라크뿐 아니라 인접국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까지 흔들어 중동질서를 재편하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중동에서 비중이 큰 3개국을 장악하면 다른 나라들은 손쉽게 미국을 따라올 거라는 판단이죠. 이라크는 군사공격으로 장악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반테러 압박, 이란은 경제지원 유혹을 통해 장악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용출=미국의 중동질서 재편의 실질적 목표는 역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안정에 있습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이데올로그들의 구성을 보면 그런 징후가 뚜렷합니다.

김영희=그렇군요. 본지에서도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의 80% 이상이 유대계라는 사실을 지적했어요.

하용출=부시의 기반인 기독교 우파들이 품고 있는 '성지 회복'의지,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등 공화당 이데올로그들의 우파적 사고, 9.11 테러로 형성된 부시의 세계관, 이런 것들이 혼합돼 '중동정책의 핵심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란 관점이 부시 행정부에 뿌리 내린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개혁과 이스라엘의 태도 변화를 유도해 중동을 안정시키고 미국의 영향력을 제고함으로써 최종적인 중동평화를 수립한다는 생각이지요. 이라크전을 포함해 미국의 대중동 정책은 전부 이.팔 문제가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영희=프랑스.독일.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반대한데 이어 전후의 중동 질서 재편에서도 미국의 독주를 막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은 유럽과의 대립을 어떻게 풀어갈까요.

김재두=대서양동맹이 이번처럼 감정적으로 대립한 적은 없었지만 이런 구도가 고착되진 않을 겁니다. 이라크처럼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리지 않는 곳에선 타협이 가능할 겁니다.

김영희=이라크 전쟁을 놓고 국제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한 유엔의 향후 위상은 어떻게 될까요.

홍순영=미국은 힘.도덕.사명감 등 모든 면에서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미국이 볼 때 프랑스.독일은 '파라다이스 신드롬'에 빠져 있어요. 현실이 만족스럽고 좋으니까 모험할 게 없다는 태도인데 미국이 보기에는 비관주의에 불과해요. 유럽은 이를 미국의 오만한 일방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유엔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어요. 그러나 국제문제는 근본적인 이익 충돌이 아닌 한 합의로 풀어나가게 돼 있어요. 유엔은 그 합의를 도출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유엔이 없어질 걸로 보지는 않습니다. 미국과 유럽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나라들이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는 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유엔의 위상에 대해선 낙관하고 있습니다.

하용출=이라크 전쟁을 보면 국제질서가 미국의 일방주의로 기울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국제사회엔 인권.환경 등 군사력으로만 풀 수 없는 문제가 많고 미국 내에서도 군사력 우선주의에 논란이 많기 때문에 미국의 무조건적 독주는 어려울 겁니다.

김영희=북한이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에 포함됐기 때문에 이번 전쟁의 결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핵개발 사실을 시인한 북한은 이라크에 이어 미국의 또 다른 '예방전쟁'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더욱 큽니다.

홍순영=북한이 핵무기를 실제로 보유한다면 미국은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고려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맹국 남한이 피해를 보게 되는 데다 중국 등 주변국의 반발이 거세고, 국내 여론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다자적 접근을 통한 외교적 해결을 강조하고 있어요. 이는 북한이 예뻐서가 아니라 동조세력을 많이 확보할수록 북한과 관련해 어떤 조치를 하더라도 저항이 덜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용출=미국은 이라크엔 하드파워(군사력), 북한엔 소프트파워(협상)를 적용해 일방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에 다양성을 과시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엔을 벗어나면서까지 이라크를 공격했다는 비판을 무마하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것이죠. 또 북핵 문제에 중국을 끌어들여 3자회담을 갖는 것도 주목됩니다. 중국을 협상 파트너로 격상시킴으로써 유럽과 이루지 못했던 협조체제를 이루려는 의도입니다.

김영희=3자회담에서 한국이 배제된 것에 대해 비판이 많습니다.

홍순영=북한 핵 위협의 일차적 대상은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은 이번 회담에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하용출=회담에서 우리가 배제된 건 우리가 북한을 제대로 보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습니다. 북한은 미국 아닌 한국을 최대 위협으로 보고 있어요. 한국과 체제경쟁을 해야 하는 북한으로선 돈 많은 우리 체제가 큰 위협이 되는거죠. 북한이 미국에 원하는 것도 역설적으로 남한의 위협을 막고 체제를 보장해 달라는 겁니다. 북한이 회담에서 줄기차게 남한을 배제해온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차피 3자회담 구도가 불가피하다면 한국은 북한과 남북관계 개선을 논의하는 별도의 회담을 추진해 북.미간 핵협상과 병행시켜야 합니다.

김영희=18일 밤 북한이 핵 재처리 마무리 단계라고 발표했습니다. 미국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홍순영=북핵 문제는 미국이 볼 때 이미 국제질서의 일부가 돼 있습니다. 북한은 미국 아닌 국제사회 전체에 저항한다는 논리입니다. 당연히 미국은 용납못할 것입니다. 북한과 국제사회의 대치가 더욱 오래갈 것으로 보입니다.

하용출=미국은 북핵 문제가 대량살상무기를 국제적으로 관리하는 선례가 된다고 보고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북핵 문제의 처리 결과는 이라크 전후 국제질서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김영희=다음달 14일 노무현(盧武鉉)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습니다. 한국은 회담에 어떻게 임해야 할까요.

홍순영=북한의 핵무기 보유 야망이 국제규범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란 점을 북한에 알리는 것이 회담의 핵심과제입니다. 북핵 문제에서 한국이 미국과 같은 입장이라고 경고해야 위기 해결에 도움이 됩니다.

하용출=민족공조와 한.미공조간 혼란을 불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회담에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북간 평화정착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는 점을 미국 측에 인식시키는 한편 그동안 쌓인 양국간 오해를 해소하는 노력이 시급합니다.

사회=김영희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정리=강찬호.정효식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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