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남과 애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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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법원의 상징적 존재가 가인 김병로 선생이라면 검찰에서는 청남 정구영 선생(작고)과 애산 이인 선생(작고)을 꼽는다.
청남이 스물 네 살의 풋나기 대구지검 검사시절에 그는 영덕헌병분대 습격사건의 공판에 임회 하라는 일본인 검사장 삼촌일루의 지시를 받았다.
3·1운동당시 주민들이 일본헌병 막사를 불지르고 헌병7명을 처형한 사건이었다.
청남은 그 자리에서 삼촌검사장에게 『3·1운동 때 나도 만세를 부른 처지인데(당시 경성법전학생회장) 그들을 법정에 세워놓고 사형구형을 한다는 것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공판 입회를 거부했다.
청남은 작고전 담당시 일을 회고할 때 삼촌검사장이『당신의 민족적 입장을 이해하겠소. 앞으로는 정치범을 배당 않을 테니 다른 사건이나 잘해주시오』라고 말했다며 아무리 식민지라해도 조리가 있고 정의가 통하던 때였다고 했다.
애산은 해방 후 군정치하의 검찰총장으로 좌익계열 세력을 진압해 검찰의 초석을 닦아놓은 공로자. 초대 검찰총장을 지낸 권승렬씨(작고)가 총장 재직당시 상공장관이던 임영신씨를 독직 죄로 기소한일이 있다. 장관이던 이인씨가 『기소하지 말라』고 지시하자 그는 『장관은 정책 지시만 하고 사건지휘는 하지 말라』고 불응, 정치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한 검찰 총수로 기록되고 있다.
3대 총장이던 서상권씨(작고)는 조그마한 비위라도 걸려들면 정부고관이고 재계거물이고 가리지 않고 잡아넣어「호랑이」의 별명이 붙어 다녔다. 「헤이그」밀사였던 이준 열사도 평이원(지금의 대법원)의 검사였다.
지금 대법원 자리에 있던 평이원과 덕수궁사이엔 구름다리가 있었으며 고종황제가 친국을 하기 위해 이 구름다리를 넘어 다녔고 그 때 평이원 검사 이준의 강직성, 대담한 성격이 고종의 마음에 들어 밀사로 뽑혔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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