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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당백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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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새시대새정치」의 깃발을 들고 새정당들이 모습을 드러낸지 1백일. 민정당이 24일, 민한당이 26일로써 각각 백일이며 내주말인 5월2일이 국민당의 백일이다. 그런가하면 지난 총선거에서 단 1석도 못얻은 사회·원일민립·통민·기민당 등 4개 정당은 l백일도 못 견디고 조사해 버렸다. 과연 새정당들이 당초 내건 깃발대로 얼마만큼 「새정치」를 하며 구정당과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또 1백일을 지나는 사이 각 당은 얼마나 내부변화를 겪었는지.
○…창당 1백일에 두드러진 민정당의 구조적 변화는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한, 당체제의 일원화. 과거 공화당이 당의장 아래 정책위의장·사무총장·원내총무의 당 3역중심으로 움직이던 것에 비교하면 오늘의 민정당은 정책과 원내까지. 사무총장이 관장하는 이를테면 사무총장 구심체제.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한 당내이너서클의 유대는 단단하다. 『과거 공화당이 망한 이유는 「친김」「반김」하며 서로 싸웠기때문』이란 교훈탓인지 고위간부간의 인화노력은 두드러진다. 공화당출신의 한사무국간부는 『당간부들의 개혁의지와 자세, 그리고 옳은 점을 지적하면 서슴없이 들어주는게 공화당과 가장 차이가 나는 점』이라고 했다.
과거 정당과의 또 다른 면모는 이른바 「당우위논」이다.「국회의원은 정당의 파유원」이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대원내사무국우위가 강조되고있는데 이는 초기공화당과는 흡사하지만 중기이후 공화당과는 판이한 현상. 한 간부는 전과 다른 또한가지로 긴밀한 당정협조체제를 들고 있다.
당과 행정부의 개혁주도그룹과의 비공식 접촉 채널이 항상 열려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공화당이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해서 당간부들이 위의 눈치를 살펴 「감의 정치」를 할 수밖에 엾었던 과거와 비교하면 당간부들이 확실한 방향위에서 당을 운영해 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셈이다.
○…1백일의 짧은기간에 비해 민정당의 인물변화는 적잖은 편.
창당당시 민정당의 간판격이던 인물들 중 몇명은 이제 당에서 얼굴을 찾아볼 수 없다. 이용희 (평화통일위원장) 황산덕(창당발기부위원장)씨가 사실상 당을 떠난 상태고 창당준비위부위원장이던 정수창 (상의회장) 정명섭 (전의원) 씨도 당사에 나오질 않는다.
「4·1」당직개편으로 대의기구와 특별위원회는 전원교체의 기록을 남겼고 사무국간부 중에도 총무·선전·여성·운영국장을 제외한 국장급이 모두 바뀌거나 자리바꿈을 했다. 그러나 당사무국의 핵심골간은 요지부동이어서 대조적.
구공화요원을 그대로 흡수했던 시·도사무국장도 많이 바뀌었지만 교체인물 역시 대부분 공화당출신들.
○…과거 신민당운영이 계보 또는 계보보스간의 균형과 이해관계를 감안해 이루어진데 반해 민한당은 철저한 탈계보란 점에서는 일단 성공한 셈.
유치송총재는 당의 공식회의 때마다 탈계보정치를 강조하고 최근 당직자 임명장수여때는 『계보활동을 하려면 당을 떠나라』고까지 경고한 바 있다.
유총재는 자신과 함께 창당주역을 맡았던 신상우사무총장의 지나친 돌출을 막자는 의도 (?)로 해석되는 유옥고·이태구씨 등 원로의 부총재 기용과 함께 신총장과 같은 항렬에는 고재청원내총무와 한영수정책심의회의장을 병렬시켜놓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신총장이 계속 당의 운영과 진로에 실력을 행사하고 있고 특히 사무처의 1실9국장이 전부 원내로 짜여짐으로써 사무처의 강화, 사무총장 권한강화가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민정당과 흡사하게 사무총장 권한이 강화된 것이 새 야당의 특징이다.
다만 계보정치가 없어지고 유총재체제나 사실장의 신총장권한강화가 이루어져 있다해서 대여자세가 전과같다고 볼 수는 없다.
○…구성인물의 면에서 본다면 민한당의 골격은 여전히 구신민인사.
지난 1월17일 창당때 발기인으로 나섰던 47명중 18명이 총선거 또는 그 이전에 탈락하긴 했어도 구신민당의원은 대부분 민한당의 뼈대와 얼굴을 형성하고 있다.
유치송. 김은하 신상우 고재청 한영수씨 등 구정치인들이 당의 요직을 장악한 반면 신인으로서 창당발기인 대열에 참여했던 인사들중에는 탈락자가 많았다.
관계출신의 최운지 정상작씨, 실업인출신의 김정우 이태식 허만기씨, 노동계의 박영성씨,군출신인 서국신 양창우씨. 해외교포출신 박태달씨 등은 일선에서 물러섰거나 재기를 기다리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민한당은 인물구성에서 구신민뿐아니라 구 민주당시절의 인물들까지 부총재나 자문위원장 또는 위원 등으로 배려함으로써 「개혁」「새시대」를 주장하는 민정당에 대해 「전통」「경험」이 조화된 새정치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한편 민권당 등 야권내의 도전에 대해선「정통」을 주장할 수 있게 배역을 짜놓고 있는 셈.
○…「새시대」의 고창속에 유독 「공화당의 뿌리」를 내세우며 구시대의 구연으로 창당했지만 국민당이야말로 새시대의 산물.
지난날에는 없던 제3당의 역할을 국민당이 어떻게 수행하며 오늘의 정계판도에서 어떤좌표를 차지할지는 두고 볼일이란 점에서 국민당은 의지할「전례」가 없다.
제3당을 처음 시도했던 탓인지는 모르나 국민당만큼 시행착오와 기복이 심했던 당도 없을 듯. 우선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라는 말이 실감날 만큼 몇달도 안되는 사이 주역교체가 이뤄졌다.
그동안 창당발기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종철총재는 원외의 의로운 조타수로 물러앉았고 양찬우 김룡호 부위원장과 윤인직 이진근 정희섭 상임위원 등 굵직굵직한 이름들은 낙선하여「당고문」의 뒷방차지로 물러앉았다.
그토록 공화당의 「뿌리」를 호소했지만 10대공화당의원중에는 이만섭부총재만이 살아남았고 오히려 금영광·조일제·신철균·김종하·김유복·조병규씨 등 6명의 10대유정회의원이 원내주축을 이루어 창당초의 공화·유정밸런스는 역전된 셈.
「준여」라느니 『선거후에 민정당에 합당한다』느니 등 무수한 매터도속에 「생존」의 몸부림이 돋보였던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국민당의 백일사다.
이런 매터도에 저항이라도 하듯 김총재의 잇따른 「위험수위」발언과 선명야당다짐이 있었지만 제3당인 국민당의 정치좌표와 역할은 아직 정립돼 있지 않다는 것이 정가의 중론. 어려운 당살림에 소속의원에 대한 당 통제력도 의심스럽고 민정·민한당과의 관계 역시 미지수다.
○…1∼2명의 의원으로 근근이 명맥을 잇고있는 군소정당들은「백일잔치」라는 행사를 즐길 여력이 없다.
실의를 씹고있는 이들은 잊혀져가는 자신들의 이름을 간간이 나도는 합당설 속에서나 찾아보며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곤 한다.
이들은 서로 『우리당이 ××당을 흡수키로했다』고 주장하지만 민주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당대표가 원외이기 때문에「당」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성명서마저 큰 신빙성이 없을정도. 오히려 금배지에 대한 보답으로 부총재 등 고위당직에 추대된 의원들의 한마디가 더 관심. 더구나 「귀중한」 의원마저 무소속과 함께 의정동우회로 휩싸여버려 군소정당가는 소외감과 허탈감이 돈다.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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