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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5)<제73화>증권시장(23)|「한국투자개발공사」|이현상(제자=필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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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제 투자개발공사 설립의 뒷얘기를 끝으로 필자의 집필을 마감하려한다.
전미한 바와 같이 대한증권거래소는 전반적인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한 채 설립된 조산아였기 때문에 증시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증시발전의 제1조건은 무엇보다도 주식의 분산이다.
즉 투자자가 언제든지 주식을 사고 팔 수 있도록 충분한 매매물량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증시는 마치 진열장의 상품도 없이 간판만 걸어놓은 상점과 같아서 상장증권도 적을 뿐 아니라 그나마 대부분이 정부나 국영기업체, 몇몇 개인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기업들도 가족회사제도를 벗어나지 못해 주식이 분산되지 않아 아무리 좋은 기업이라 해도 일반대중이 투자를 통해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막혀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투자개발공사의 설립이야말로 증시는 물론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5월 파동이 한 바탕 휩쓸고 지나간 증시는 황무지와 같았다.
정부에서도 증시대책을 거의 외면하고 있던 터라 증시는 존재가치조차 무의미하게 되었다.
당시 필자는 거래소에서 일을 보며 역대 재무장관과 이재국장에게 계속적으로 증시발전책을 건의했으나 증시는 그들에게 「골치거리」일 뿐이었다.
조산아로서 기형적인 성장을 해온 증시가 이제는 다루기 힘든 문제아가 되었다고나 할까.
재무부 당국자들은 한결같이『내재임기간만큼은 제발 증시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힘써달라』며 도리어 필자에게 부탁을 해오곤 했다.
당시 거래소의 운영도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직원들의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해 매달 말이면 5개 시중 은행장 실을 들락거리며 무담보로 돈을 꾸어오곤 했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특히 당시 문종건 조흥은행장은 항상 필자를 따뜻이 맞아주었고 어려운 부탁도 쾌히 들어주곤 해 후에 필자는 거래소관계모든 예금은 조흥은행창구를 통하도록 하는「답례」를 했다.
이토록 황무지와 같이 버려져있던 증시도 마침내 당시 이남준 국회 의원과 장덕진 이재시장의 출현으로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맞게 되었다.
이 의원은 전남진도 출신으로 6대 국회에 나오면서부터 우러나라 경제가 발전하는 길은 증시육성 밖에 없다는 소신을 갖고 68년11월「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이 이 국회에서 통과될 때까지 3년8개월간을 주위의 모해와 모함 속에서 꿋꿋이 버텨온 증시발전의 공로자다.
심지어 당시 국회에서 이 의원은 「증권 의원」으로 불릴 정도였다.
필자는 이 의원의 출현으로 백만 대군을 얻은 듯하여 매일 이 의원과 머리를 맞대고 증시대책을 숙의하곤 했다.
때마침 재무부에는 장덕진 이재국장이 앉게되고 장 국장은 취임하자마자 필자를 불러 재임기간 중에 기필코 증권시장을 육성, 발전시킬 뜻을 비쳤다.
그리하여 국회의 이 의원, 재무부의 장 국장, 그리고 거래소의 필자가「트리오」로 내놓은 첫 작품이 바로「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의 제정과 한국투자개발공사의 설립이었다.
이 법의 주요글자는 기업공개를 통한 주식의 분산을 추진하고 이를 위한 전담기구로 투자개발 공사를 설립하며 상장증권을 증시에서 거래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정부관계기관에 납부할 공탁금·보증금 등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대용가격을 책정하고 특히 종업원에 대한 공개주식의 우선배정을 규정해 기업경영의 체질개선을 뒷받침한 것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들이었다.
투자개발공사의 현판을 걸던 날은 필자의 평생을 통해 잊을 수 없는 몇몇 날 중의 하나다.
당시 개사식에 예고 없이 장식했던 고 박정희 대통령의 치사내용은 투자개발공사의 설립취지를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즉 투공의 설립은 곧 우리나라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는 계기며 앞으로 각 기업은 무조건 정부의 지원에만 기대치 말고 독점하고 있는 주식을 과감히 공개하여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통해 기업체질을 개선해 나아가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후 투공은 증시발전에 큰 기여를 했으며 또한 기업공개촉진법도 제정되어(72년12월30일)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명문화되는 등 자본시장육성법의 제정은 일대 경제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증권의원」이라는 야유를 받아가면서도 자본시장 육성법의 산파역할을 했었던 이 의원은 지난7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필자의 기억으로 그만큼 우리나라경제발전을 위해 국회에서 동분서주한 사람도 별로 없다.
필자는 이 의원이 법안통과를 위해 노력할 당시 동료국회의원들이 하던 농담을 지금도 기억하고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주식을 가졌기에 그리 야단이냐』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의원이 가지고있던 주식은 단 한 장도 없었거니와 이 기회에 필자자신도 이제껏 주식투자에는 한푼도 써본 일이 없다는 것을 밝히면서 졸고의 붓을 놓으려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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