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 '651년 금기' 깨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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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영국 의회가 입법 공무원들의 수장(首長)을 뽑는 일로 시끄럽다. ‘하원의 입법 서기(The Clerk)’로 불리지만 우리로 치면 국회 사무총장 자리를 두고서다. 1363년부터 있던 자리로 연봉이 20만 파운드(3억3000만원)나 되는 고위직이다.

 존 버커우 하원의장은 곧 공석이 될 이 자리에 호주 여성인 캐롤 밀스(사진)를 지명했다. 그러자 여야 의원들은 물론 입법 서기들도 들고 일어났다.

 버커우 의장 측은 “선발위원회를 거쳐 후보자들 중에서 가장 적임자를 골랐다”며 “인터뷰 룸에 있었다면 모두 동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외교장관을 지낸 존 스트로 의원 등은 “여성을 뽑기 위해 선발과정을 악용했다”고 맞섰다. 이른바 역(易) 성차별 논란이다. 일부 입법 서기도 이에 동조한다. 입법 서기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제청을 거쳐 엘리자베스 2세가 확정하는데 밀스가 임명되면 초대 클러크인 로버트 드 멜튼 이래 651년 만에 첫 여성이 된다. 역대 49명은 모두 남자였다.

 논란을 키우는 건 밀스가 호주 의회에서 일했을 뿐 영국 의회 경험이 없다는 점도 있다. 호주 상원의 입법 서기인 캐서린 레닌이 e메일로 “밀스는 (호주 의회에서도) 의정에 대한 경험도 지식도 없다”며 “기이하고 당황스런 인선”이라고 알리기까지 했다. 일각에선 “버커우 의장이 껄끄러운 기존 인사들을 꺼린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버커우 의장은 그러자 입법 서기의 역할을 둘로 쪼개 밀스에겐 행정업무만 맡기는 안을 제시했다. 입법 서기의 또 다른 업무인 의장·의원들에게 입법 조언을 하는 고위직을 신설하겠다는 것이다. 의원들은 “의원들보다 연봉이 높은 자리를 또 만들겠다는 것이냐”고 반발하고 있다. 밀스 자신은 “잘 할 자신이 있다”는 입장이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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