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임영록·이건호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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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국민은행의 주 전산기 교체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위원회가 이 문제와 관련해 KB금융 임영록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을 경징계하기로 했지만 이사회의 결정에 대해서는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측은 징계결과를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해석하며 갈등 재점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25일 “지주의 정보관리 최고책임자(CIO)가 중징계를 받은 만큼 (유닉스) 결정과정의 투명성에 문제가 있었다는 걸 감독당국이 확인했다”며 “당연히 교체 문제를 재논의 해야 하고, 조그만 의혹도 없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행장은 임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회장은 이미 주 전산기 문제에 대해 행장과 이사들이 의논하라고 일임해놓았다”며 “회장과 새롭게 풀어야할 문제가 있는게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금감원은 주 전산기 교체와 관련해서는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상태다. 제재심 한 관계자는 “사회적 물의라는 차원에서 두 CEO가 잘못이 있지만 중징계할만한 근거가 약하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주 전산기 부분은 누가 더 잘하고 잘못했다는 판단은 안했다”고 설명했다. 최전선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던 감사와 사외이사 양측에 같은 ‘주의’ 징계를 결정한 것도 제재심이 중립이라는 상징적인 신호다.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사안임에도,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KB금융의 내분 사태는 4월 주전산기를 기존 IBM 메인프레임에서 유닉스로 교체하기로 한 이사회의 결정에 대해 이 행장과 정병기 감사가 반기를 들면서 표면화됐다. 결정 과정에 하자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사회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이 행장 측은 5월 금감원에 특별검사를 요청했다. 사외이사들은 6월 23일 이사회에서 한국IBM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는 안건을 6명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 행장은 한국IBM도 전산 사업자 입찰 제안 대상에 포함하자는 입장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5월 30일에 이사진과 합의했던 것이 징계가 끝난 뒤에 논의를 진행하자는 것”이라며 “징계 결과가 이렇게 나온 이상 유닉스랑 IBM을 경쟁 붙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주사 관계자는 “이번 징계 결정이 유닉스로의 전환이라는 이사회 결정이 잘못됐다는 판단을 한 것은 아니다”라며 “행장이 이사회와 관계를 풀어가는데 회장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포용·중재하는 차원에서 회장이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현 상황에서 IBM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이 행장 측과 시각을 달리했다.

박유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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