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에만 글씨…속은 백지-화제의 책 「무」·「공」서점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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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표지를 보면 분명히 책이다. 그러나 펼쳐보면 글자 한자 없는 백지들뿐 사실은 공책이나 다름없다.
책이라고 인정하기엔 어딘가 좀 난처한 그런 묘한(?)책이 나와 출판가 및 서점가에 푸짐한 얘기를 뿌리고 있다.
태봉출판사(대표 왕한조·서울 삼청동 산2의10)에서 만들어낸 화제의 백지 책은 두 가지다. 표지에 『공』이라는 제목을 단 것과 『무』라는 제목을 단것으로 둘 다 똑같이 국판크기에 3백60페이지 짜리. 백지 책이라 해서 글자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앞뒤 표지만은 여느 단행본들과 비슷한 폼을 잡고있다.
흰 바탕의 외곽에는 금테를 물렀고 앞표지의 한가운데에는 서예가 손경식씨의 솜씨로 제목인 없을 「무」 또는 빌 「공」자가 예서체로 씌어져있다. 뒤 표지에는 만해 한용운의 짤막한 시 한편이 실려있다. 다만 일반 단행본들과는 달리 저자·출판사의 이름이 전혀 없다.
표지를 넘기면 첫 페이지의 아랫부분에 시한수가 실려있다. 「무」라는 이름을 가진 책에는 이백의 시, 「공」이란 책에는 두보의 시가 각각 실려있다. 내용은 둘 다 인생의 허망함과 고적함을 읊은 것들이다. 책의 옆부분인 세모 지에도 부제가 있다. 「무」라는 책에 달린 부제는 「당신과 백지와의 대화」이고, 「공」이란 책의 부제는 낱말의 순서만 바꿔 「백지와 당신과의 대화」라고 되어있다. 표지를 제의하고 백지 책에 실린 글자는 모두 48자 뿐이다.
나머지 3백59페이지는 페이지를 표시한 것마저 없어 보기에 민망할 만큼 백지의 대 행진이다. 이런 책이 정가 2천원씩임에도 불구하고 발행 3개월만에 5만 부나 불티나듯 팔렸다는 것이 출판사 측의 주장이다.
이 숫자는 물론 출판사 측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서점 가에서는 그 절반정도인 2만5천여 부가 팔렸다고 말하고 있다. 백지 책 출판이 우리나라에선 처음 있는 출판해프닝이지만 미국과 「스웨덴」에선 이미 8년쯤 전에 시도해 짭짤한 재미를 봤다는 기록이 있다.
백지 책 출판을 국내처음으로 시도한 대종출판사 대표 왕씨는 『출판이란 늘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같은 백지 책을 만들어봤을 뿐』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소규모출판사로선 큰 모험일 수 밖에 없는 일이어서 꼭 히트를 치겠다는 욕심보다 한번 시도했다는데서 의미를 찾으려 했던게 뜻 밖에 성공을 한 것 같다』고 했다.
이 출판사 편집장 홍성복씨(34)는 『모든 책들이 글자와 사진으로 빽빽하게 메워져 있어 독자들이 쉽게 염증을 느낀다는 점을 역이용, 부제처럼 백지와의 만남을 주선해본 것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모양』이라고 했다.
또 누구나 한번쯤 백지를 응시할 때 철학하는 기분을 갖게되고 아니면 훨훨 공상의 날개를 펴보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정보홍수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지친 영혼을 달려주려는 게 바로 백지 책을 만들어낸 출판사의 저의라고 했다.
독자의 반응은 백인백색이라는 게 서점 가의 귀뜸. 어떤 대학생은 이 책을 뒤적이다 문득 숙연해져서 『아! 바로 이거다』며 뭔가 알아챘다는 듯 선뜻 사 가는가 하면, 어떤 대학생은 『미친놈 취급 안 받기 위해 이런 책은 안 산다』며 떠들었고, 어떤 여학생은 일기장하기 딱 좋다며 사는가 하면, 더욱 재미난 것은 혹시 물을 묻히면 글자가 떠오르는가 해서 점원 몰래 손가락에 침을 발라 살짝 백지를 문질러 보는 손님들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출판사에 대해서는 『혹시 파본이 아니냐』며 교환해줄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이 시대의 가장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출판사』라며 격려를 하기도하고, 『사용법을 알려달라』 는 간절한 부탁이 있는 반면, 대뜸 『이것도 책이라고 만들었느냐』며 욕을 하는 독자도 있었다고 편집장 홍씨는 말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꼭 같은 쌍둥이 책이지만 「무」라는 제목을 붙인 게 압도적으로 많이 팔린다고 했다. <정보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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