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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문학상 본심 후보작 ⑦ 시 - 이원 '의자에 … ' 외 21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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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원의 시는 낯설고 어려운 현대시의 한 풍경이다. 그는 “내 시는 음식으로 얘기하면 하나로 연결된 국수 가락이 아니라 따로따로인 수제비 같은 시”라며 “각각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에 주목하면서 감상하시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시인 이원(46)은 현대시의 다채로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96년 첫 시집 제목인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는 같은 해 해체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제목이다. 이 시집에 실린 첫 시의 제목은 ‘PC’. 2001년 두 번째 시집은 세종대왕의 찬불가(讚佛歌) ‘월인천강지곡’을 비튼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였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 ‘나는 클릭한다/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유명세를 탔다.

 얼핏 ‘0’과 ‘1’의 무한 연쇄가 만드는 디지털 가상세계 안에서 길 잃고 분열된 자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재빠른 감각의 문명비판적인 면모는 이씨의 일부일 뿐이다. 그의 시편들은 보다 묵직하고 근원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씨가 흠모했던 스승 오규원(1941∼2007) 시인이 ‘신표현주의’라고 명명한 시편들에서는 가차 없는 시선, 강렬한 수사(修辭)가 돋보인다. 정밀묘사를 위한 대상 왜곡이다.

 올해 미당문학상 후보작 22편 가운데 ‘점점 더 단단한 공이 되어가려는 듯이’는 신표현주의 계열로 읽힌다.

 시 속에서 알몸의 여자는 샤워 부스 바닥에 웅크려 토악질을 하고 있다. 헛구역질인 듯 ‘눈물은 머리통을 뚫고 나오지 못’하고, 여자는 ‘점점 더 몸을 웅크’리고 등은 ‘부풀어 오른다’. ‘목구멍에서 항문까지 하나로 뚫린’ 여자의 몸 위로 ‘물 쏟아지는 소리가 잘린 철사처럼 쏟아진다’. 결국 시인은 ‘여자의 허리뼈를 따라 꿰맨 자국이 선명해진다/파고 묻고 메운 구덩이처럼 여자는 있다’라고 묘사한다. 섬뜩한 표현이다.

 네 편이 포함된 ‘애플 스토어’ 연작시는 현대사회의 디스토피아적 면모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한없이 매끄럽고 간지러운 문명의 첨단 기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이면에 노동착취·인간소외 등이 똬리를 틀고 있는 건 아닌가. 네 편 중 ‘애플 스토어 1’은 지난 4월 동료 시인·평론가 100명이 선정한 ‘오늘의 시’에 선정됐다. 하지만 감상이 쉽지는 않다. 시인 문태준은 “해석의 여지가 많은 작품”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전문을 소개한 시 ‘의자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에 대해 이씨는 “갈수록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쓴 시”라고 설명했다. 의자에 엉거주춤 앉은 자세에서 의자를 빼낸 후 사람의 자세에만 주목하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모습인가. 의자에 앉아 음식이라도 먹는다면 항문과 입이 동시에 열린 묘한 상태가 되는 게 아닌가. 이씨는 “먹고 살기 위해 숟가락·젓가락 드는 자세를 무한반복해야 하고, 늦은 밤 귀가할 때 교통편을 찾고 타고 내려 걷는 똑같은 절차를 반복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뭔가 인간 존재에 끔찍한 점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의자에…’는 단순히 인간 행동의 맹목적인 부분, 존재의 한계 등을 파고 든 작품이 아니다. 이씨는 “시의 형식 실험과 정서의 표출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항목의 화해를 꾀했다는 점에서 내게는 일종의 시적 전회(轉回)의 의미가 있다”라고 했다. 물론 그런 특징을 잘 포착하려면 지금까지 이씨 시의 궤적 전체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원=1968년 경기도 화성 출생. 92년 등단. 시집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불가능한 종이의 역사』. ‘현대시학’ 작품상, ‘현대시’ 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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