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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술가의 아내|시인 박태진씨 부인|김혜원여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일본「릿꾜」(입교) 대학 유학시절인 40년대초 일찌기 영♠문학에 눈떠 한국시단에「모더니즘」의 지평을 연 시인 박태진씨(60)-.
한국문증에서 손꼽히는 서환취향의 멋쟁이요, 미식가인 그는 최근 발간된 자신의 선시집 끝에 역시 멋쟁이로 알뜰한 내조를 해온 그의 아내 김혜원여사(54)를『나의 작품생활을 하는데 생애의 반려를 해준 아내 혜원에게 새삼 고마워하며…』라고 썼다.
『그분과의 결혼을 결정했을 때 사실 앞으로 같이 살일이 굉장히 불안했어요. 6·25전쟁 중이었으니까 집도 돈도 없었던 것은 누구나 비슷했지만 워낙 취향이 까다로워 그 비위 맞추기가 어려웠어요.』
전시라서 오히려 더 갈망했던것 같은 비현실적인 낭만, 그리고 관리였던 아버지 밑에서의 보수적인 가정분위기에서 싹튼 반합경신이 자유인은 남편으로 택하게 한 동기가 됐던 것 같다고 김여사는 얘기한다.
이들 부부의 첫 만남은 전시의 수도였던 부산에서 양쪽을 잘 알던 직장동료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당시 김여사는 26세, 이대를 졸업하고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다. 박씨는 미군관계의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31세의 노총각.
『만난지 얼만 안돼 그분이 직장관계로 먼저 서울에 오게되었어요. 그때 문통을 지독히 했어요.「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을 얘기하고 상대를 알게되었어요. 교제한지6개월만에 결혼을 했지요.』
그때 1주일에도 몇 차례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쌓아올린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과 신뢰의 깊이는 오늘날까지도 변치 않고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해오는데 밑바탕이 되었다고 김여사는 얘기한다.
『결혼생활을 30년 가까이 해오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항상 제 자신을 상대로 하여금 신선하게 느끼도록 하는 노력이었어요. 멋을 알고 맛을 찾는 예술가 기질의 사람이란 됨됨이가 좀 까다로워요?「모더니스트」에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힘들었어요.』
김여사는 항상 단정한 차림이어야 했고 살림도 알뜰하게 할수 있어야했다.
부군의 직장(동양 화재해상 보험 부사장)일 관계로 외국사람을 만나는 기회가 잦으니 만큼 영어도 잘해야한다.「매너」도 훌륭해야 한다.
그 모든 일을 김여사는『자신을 돌볼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노력했다고 얘기한다. 소문난 부지런함에 적극적이고 명랑한 그의 성격이 큰 보람이 되었던 것 같다. 요리에 흥미가 많고 요리하기를 즐기는 취미도 즐겁게 부군 뒷바라지를 할수 있게 했다. 부군의 임지를 따라 영국에서 3년간을 살았던 경험도 까다로운 예술가의 아내노릇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한 4년전쯤 그 양반이 심하게 위궤양을 앓았어요. 아마 그것이 항상 직장과 글 쓰는 일 사이에서 느꼈던 심한 심리적인 갈등 때문인듯 싶어요.』
남편은 시를 쓰고 나면 항상 아내에게 먼저 읽어보라고 권한다. 그때면 기쁘게 읽지만 이렇다 저렇다, 평을 할 때는 상당히 조심을 한다.
행여「델리키트」한 감성이 상처를 입을까 염려스러워서다.
또 상대방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는 겸손 때문이기도 하다.
『일과 시만을 생각하는, 어떤 의미로는 냉정한 남자예요. 그래서 저는 스스로 즐겁게 살도록 노력하죠. 우울하게 살기에는 세상에는 즐길 일, 흥미로운 일이 너무 많아요.』
남편과의 외식,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누비며 반찬거리를 사는 일과 음식 만들기, 살고있는 여의도「아파트」촌 산책, 어느것 하나 그에겐 즐겁지 않은 일이 없다.
요즈음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한잔의「코피」를 앞에 놓고 부군과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 즐겁고 소중하다. 김여사의 부군에 대한 바람은 조금쯤 무뎌져서 긴장을 풀고 편안한 나날을 보냈으면 하는 것이다. 슬하에 올봄 인하대불문과에 입학한 외딸 서정양이 있다. <박금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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