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란 무엇인가|부름회관서 문학강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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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선시를 주제로 한 문학강연회가 16일 하오 부름회관에서 열려 관심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돈연 스님(시인·조계종 교육국장)은 『시에 있어서 선의 제문제』를, 김정휴 스님(시인·불교신문편집국장)은 『역대고승들의 선시』를 주제로 각각 강연했다. 돈연 스님의 강연내용을 요약한다.
시와 나의 관계는 일반사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특수한 의미는 성립되지 않지만 시가 갖는 섬세한 내용상 비의 세계는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것들은 상징주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상징주의 자체는 어디까지나 그것 자체로 성립되는 사고의 한 형태이면서 「말라르메」나 「빌레리」의 경우 가장 완벽한 상징주의 시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물론 시가 선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 의식이라는 두 가지 구조는 가장 접근된 현장언어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은 언어를 수단으로 또는 목적으로 취하기를 거부한다. 단지 체험적 존재로 거기 끊임없이 존재할 뿐이다.
말하자면 무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상황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결코 관습적 개념은 아니다.
선의 성격상 함축되고 간결한 일상 언어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구상과 파격으로 이어지는 무아의 세계 파격과 섬세-체험의 일상화로 나눌 수 있다.
「말라르메」가 「단순하고 완벽한 형태의 동적 존재」를 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아의 체득이라는 것도 모든 개념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세계의 사물에 내재한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하고 있는 사물의 「이미지」에 대한 자기자신의 체험』바로 그것이다.
상징주의가 처음 도달한 『공 세계 저편의 텅 빈 공허』는 비에서 무기공이 된다. 끝없는 시문(관념)이 흘러도(반복) 그 곳의 탈출은 실현되지 않는 의식의 정지현상이다.
타파서통·백척간두진일보의 소식에 의해 비로소 일상화될 수 있다.
결국 파격과 섬세라고 하는 것은 불확실한 「이미지」의 우연적인 구속력이 사물의 근본적인 명백성과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무아의 상황이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예술의 형태 저 너머에 끊임없이 존재하는 생동언어의 현장일 것이다.
선은 결론에 도달할 수도 없거니와 선이 결론에 도달된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선이 이성과 감각의 궁극적인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선은 그것 자체가 사물의 일상의 전부」라는 가장 가까운 즉물의 의미를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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