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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농민의 적은 부패|불「르·몽드」가 파헤친 당과 정부의 횡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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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폴란드」사태』에서 통일 노동당(「폴란드」공산당)에 가장 격렬히 맞서고 있는 세력은 자영농민조직인 자유농업노조다. 정부측도 자유농업노조를 인정치 않겠다는 방침이고 「폴란드」경제의 「아킬레스」건이랄 수 있는 「폴란드」농업실태를 생생하게 파헤친 「르포」기사에서 「폴란드」 농민을 분노케 한 것은 바로 농민의 의욕을 말살하는 당과 정부의 부패라고 진단했다.
「바르샤바」남쪽 약 60㎞떨어져 있는 「즈브로샤듀사」. 작년 8월 자유노조의 파업 이전부터 농민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다.
78년 「우유파업」, 「로마」교황 방문때의 「과일파업」이 바로 그것이다.
이 지구의 젊은 주임 사제 「사도롭스키신부」는 이 일련의 사태를 가장 정확히 알고 있다. 농민들이 집회를 가진다거나 토론과 새 노조등록을 할 때는 이 신부의 집에서 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10여년간 이 지구 농민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있는 진보적인 신부다.
신부의 안내로 「즈브루샤듀사」에서 2㎞정도의 거리에 있는 농가를 방문했다.
짚더미 위에는 병든 40세 가량의 부인이 누워 있었다. 그 부인의 어머니는 양철 남비를 땅바닥에 내려놓는다. 옆집 아주머니가 감자 몇 알을 가져다주었다. 난로에는 불이 없어 방안도 바깥이나 다름없이 추웠다.
『이것이 3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회주의국가가 노인과 환자에게 하는 것입니다』-신부의 말이다.
이 두 사람의 부인의 곤궁은 다소 예외적인 것이긴 하다. 「폴란드」의 대부분의 농민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비참한 단계까지는 안간다. 「즈브로샤듀샤」의 젊은 농민부부는 「파벨」씨와 「베로니카」씨의 경우를 본다. 두 사람은 부모로부터 받은 돈으로 결혼후 곧 농지 1만 8천평을 샀다. (「폴란드」농지의 75%는 1만 5천평내지 3만평의 소규모 자영 농민이 소유하고 있고 자영 농민수는 농업인구의 85%).
「파벨」씨는 방이 셋 있는 집을 지었으나 수도도 하수도도 없다. 방에 있는 것은 「테이블」과 의자·철제침대, 그리고 성모「마리아」의 사진정도였다. 굳이 사치품이라고 한다면 냉장고와 이 부부의 연간수입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만 「즐로티」(약8백40만원)짜리 말(馬)이다.
「트랙터」를 사는 쪽이 더 좋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전혀 가망이 없어요. 당의 지방서기에게 1만 즐로티(약2백10만원)를 뇌물로 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5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트랙터」를 손에 넣는다 해도 부속부품을 사는데 5년, 다음 부품을 사는데 다시 5년이 걸립니다. 그 동안 물론 꾸준히 뇌물을 바쳐야 하고요. 그보다는 말이 훨씬 낫지요.』 「폴란드」에는 부패가 곳곳에 만연해 있다. 더욱이 생활 수준이 낮은 시골 쪽이 더 심하다. 「바르샤바」와 「즈브로샤듀샤」를 잇는 도로 옆에는 『당에 충성을』이라는 광고 간판이 서 있으나 농민들은 「당」자 다음에 『과 도둑에게』를 집어넣고 있다.
옆집의 「안드레이」씨(60)는 「파벨」씨만큼은 가난하지 않다. 그는 작년에 5t의 고기를 정부에 팔았다. 그 돈으로 비료를 사려고 했으나 결국 사지 못했다. 「비축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도 「트랙터」는 갖고 있지 않다. 「파벨」씨처럼 갖는 것도 싫고 갖기 위해 뇌물을 주는 것도 천성에 맞지 않는다. 말 한필로 땅 2만1천평을 갈고 있어 피로에 지쳐 있었다.
그가 아직도 땅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자식들이 상속세(상속세율은 지가의 80%, 상속인이 경작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함)를 낼 능력이 없는데다 농민의 퇴직연금제도(퇴직연금은 7백50「즐로티」, 이를 받기 위해서는 국가에 토지를 양도해야 함)가 『재산을 뺏어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제슈프」지방의 산촌 「트로토프」에서도 「즈브로샤듀샤」의 농민과 마찬가지로 가난으로 허기져 있다.
『비료도 살충제도 농기구도 전혀 손에 넣을 수 없다』고 한 식료품상 여주인이 말했다. 그러나 당원이면서 군의 지방조직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식육처리업자는 달랐다. 그는 고기를 암시장에 팔고 있고 또 집과 자동차를 각각 3개나 갖고 있다. 부패의 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폴란드」의 도로변에는 『효율적인 노동으로 발전을』이라는 당의 「슬로건」이 씌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소규모 자여 농민의 경우 노동을 효율화할 수 있는 수단을 빼앗기고 있다. 작년의 「그다니스크」파업과 자유농업노조 탄생이후 농민의 저항운동은 종전과 같은 고립된 싸움에서 벗어났다.
「바르샤바」교외에서 만난 「얀·드레콥스키」씨는 15년전 단지 혼자서 당지부 서기에 맞서 싸웠다. 당국은 주저없이 그의 소에 독을 먹였고 유리창을 부수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을 시켜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은 없어졌다.
단결한 농민들의 강경한 저항을 받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고 있는 농민집회에 가서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예컨대 「바스티키도르네」에서 열렸던 집회에는 「폴란드」남동부에서 2천여명의 농민이 대표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일요일 아침 소련 국경에서 불과 9㎞밖에 안되는 이 곳의 체육관은 1천여명이 발디딜 틈도 없이 들어찼고 체육관 밖에서는 영하 10도의 추위도 무릅쓰고 1천여명이 발을 동동거리면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연설을 경청했다.
군중들은 애국적인 「마주르카」(「폴란드」민속음악)를 합창할 정도로 열기에 차 있었다.【파리=주원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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