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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홍콩」서 본 그 실상과 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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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0억의 인구. 9백60만평방㎞의면적. 세계인구의 4분의1과「유럽」전역과 맞먹고 남한보다는 l백배나 큰 땅덩어리를 가진 나라가 중공이다.
1949년 모택동이 중국대륙을 장악한뒤 30여년간 중공은 「모사상」으로 통치됐고 등소평의 실권파가 등장한뒤「이념」보다「근대화」에 역점이 두어지고 있다. 중공은 자체내에 수없는 진통을 겪으면서도「오똑이」처럼 10억인구의 통일국가로 지속돼왔다. 최근 개방정책에 따라 「죽의장막」에 가려져있던「거인」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고있다.
지난 2년간 중국대륙가까이에서 중원의 동향을 취재했던 본사 전 「홍콩」특파원 이수근기자는 중공사회의 얼굴을 그들 자신의 각종자료를통해 벗겨나갈것이다.(이수근 전 홍콩특파원)
장룡천이라는 20대의 한 노동자는 상해시고위간부들로 부터 6개월간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18명의 처녀를 농락하고 노동자임금 20개월치나 되는 1천여원을 뜯어냈다. 중공최대의 도시 상해(인구1천여만명)에서 지난해 일어났던 중공판「가짜 이강석사건」이다.
상해교외 숭명농장의 공원이었던 이청년은 청명절휴가를 따분하게 보내다 문득 가벼운 장난을 하고싶은 충동에서 한 극단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을 시의 고위간부라고 밝힌 장은 북경에서온「해방군참모차장의 아들」이 곧 연극을 보러갈 것이라고 말했다.
잠시후 참모차장의 아들로 변신한 장은 극장 문전에서 극단 부단장의정중한 마중을 받았고 공연이 끝난 뒤 호화판 만찬대접까지 받았다. 장의 장난은 거기에서 그치지 앉았다.
상해가극단에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상해가극단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한 젊은 여가수까지 소개해 주었고 상해문예계는 장에게 다과회롤 베풀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시당서기는 승용차롤 내주었으며 다른 간부들도 다투어 용돈까지 바치면서 아첨으로 경쟁했다.
상해의 문회보는 지도층이 권력을 신봉하고 남용하길 주저하지 않는 풍토에 젖어왔기 때문에 고위간부들 마저 한 풋나기 노동자의 속임수에 놀아나는 결과를 빚었다고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무한제철-. 78년초에 완공된 이 제철공장은 외화보유고 22억「달러」의 나라에서 그 절반이나 되는 11억「달러」 룰 들여 건실한 중공 현대화계획의 한 상징이다.
서독이 자금과 설비의 일부를 제공하고 일본이 건설을 맡았던 이 초현대식 공장의 입지조건은 최적이라 할만했다. 무한은 만리 장강이 그지류와 맞부딪친 곳에 이룩된 도시이며 아홉개 생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배후에는 풍부한 철광과 석탄의 산지를 끼고있어 일찍부터 손꼽히는 중공의 중공업기지로 발전했다.
이 공장은 그러나 시운전을 해보고서 뜻밖의 장애를 발견했다. 「브라질」과 호주에서 생산되는 최양질의 철광석과 석탄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이 공장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공장을 건설한 신일본제철은 애초에 무한산철광을 사용할수 있게 설계했지만 중공측이 주문처럼 외던 최신의 설비와 기술요청에 못이겨 원래의 실계를 뜯어고쳐 일본형 초현대식 제철공장을 세운것이 탈이었다.
거기에 전력공급도 총수요량의 25%수준에 그쳐 가동률은 3O%안팎에머물렀다. 그러한 여건속에 겨우 생산된 제품마저도 고급품으로 국내수요량이 생산량의 3분의1에 못미쳤고 제품가격은 국제시세에 비해 3배나 비쌌다.
『무한제절의 현실은 중공의 야심적인 현대화계획의 허구성을 폭로하는「상징」이자 오늘날 중공이 안고있는 문제의 실체를 그대로 나타내주는 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홍콩」의 좌파논객 제신은 분석했다. 최근 중공이 외국에 발주했던 중공업설비를 잇달아 취소하여 상대국으로부터 손해배상청구의 위협을 받고있는 현실은 중공의 그같은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다.
79년5월부터 80년 봄까지 중공에서 쏟아져나왔던 소설을 보면「죽의장막」속에 가려 일방적으로 미화된중공30년의 제모습이 생생하게 잡힌다.
십수년간이나 대풍을 이루었다는 공식발표에도 20년전이나 다름없이 배를 움켜잡아야 하는 농민의 고난(「관반」)이나, 돼지우릿간에 사는 신세를 면하기 의해 지난20년이상 건축자재를 구하려다 실패한 농민의 한 (「이순대조옥」)은 중공농촌의 현주소를 그대로 대변한다.
노동자들은 일을 더해도, 덜해도 똑같이 나오는 급여정책 때문에 일하는체 홍내만 낸다. 그래서 9천명의 직원을 가진 전기공장은 1천명의 임시직공을 채용하여 간신히 생산책임량을 채운다.어이없게도 임시직공의 하루 임금이 정식공원의 그것보다 훨씬 웃돈다(「교창장상임기」).군구병원장(군인)과 그 아들이 한 간호원(여군)을 번갈아 강간한다(「재사회적당안리」 ) . 한 지식청년은 사복을 채우는 상급자에게 뇌물을 바치고서야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었다(「조동」). 복권된 장군이 유치원을「불도저」로 밀어붙이고 수십만「달러」의 외화를 유용하여 의국에서 최고급 원자재를 들여다 대저택을 짓는다(「장군,부능저양주!」).
소설에 나타난 이러한 비리와 부패사례들은 어느사회나 있게 마련인사실이 과장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홍콩」에서 중공계 제3인자로 알려져 있는 좌파평론가 이이(월간 「칠십년대」편집인·필명 제신)가 이런 소설들을 모아 한권의 책으로 내면서 일종의「자기고백」을했다.
그는 『해외의 많은 좌파인사들이 중공의 현실이 소설에 나타난 정황과는 다르길 간절히 바랐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따라서 과거 중공을 흠모했던 많은 해외좌파인사들이 일종의 절망과 사기를 당했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울울하고도 허망한 심사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중공의 현존하는 대표적 지성 파금(77·중공문학가 협회 부주석)은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던 젊은 시절의 확신에 좌절을 느끼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젊은 시절 「파리」에서 문학수업을 하면서 봉건가정의 부패와 악덕에 환멸을 느끼고 사회주의자로 전환했던 파금은 79년「홍콩」 의 좌파지 『대공보』에 연재한 수상록에서『진실을 말한다면 나의 세대는 반봉건투쟁이나 민주주의의 실현중 어느 하나도 결코 이루지 못했다』 고 했다.
이 원로작가는『지금까지 사람들과 만나면서 내가 습관적으로 한 말은 과장과 허황한 낱말에 불과했으며 어떻게 하면 영도자에게 점수를 딸까하는 그런말뿐이었다』고 회개한다.
중공지식인들은 『작가는 자유롭게 창작해야 하고 그런 분위기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파금의 절규를 듣고 벼락을 맞은듯한 반향을 보였다고「홍콩」의 저명한 평론가 사마장풍은 전했다.
이이의 고백이 체제의 바깥에서 간접적 경험을 통해 획득한 「개안」 이었다면 파금의 회한은 체제내의 뼈저린 체험에서 우러나온 「상처받은 육성」이다.【이 수 근 전 홍 콩 특 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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