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점의 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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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대학의 면접고사가 끝난 이튿날의 신문은 놀라운 사실을 싣고 있었다. 사상 초유의 명문대 정원미달 사태. 기상 천외한 결과에 아연해질 수밖에. 허구성이 빚어낸 이변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리기에는 뭔가 씁쓸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중에 압권이 되어버린 1백84점짜리의 서울대법대 합격을 두고 신문은 또 한번 지진이 일어났다. 따라지가 9땡을 누른 도박에다 비교하기도 했다. 배짱이 뚫은 관문이라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평에 그렇다고 할 수도,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없었으니 어리벙벙해질 수밖에.
그런데 막상 당사자의 얘기가 실린 지면을 보마나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리저리 계산된 뒤에 행해지는 우리네 행동이 얼마나 치졸스런 생으로 내몰려지든지…그 반대로 단순하고 우직한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잇점이 될 수가 있는지…그야말로 우리네 생이 얼마나 허구로 가득찬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1백84점은 나의 전부」이며 그러한 「점수 때문에 자신의 꿈까지 바꿀수야 없다」고 말하는 윤용준군의 그 당당한 말에 그저 할말이 없다. 그래서 윤군 자신은 결코 엉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은 남들처럼 눈치도 안보았고, 우왕좌왕하지 않았고, 그저 외길만을 걸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정심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기에게 돌아온 손익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면 상대는 어떻게 생각할 것이고 그런 뒤 내게 돌아올 것은 무엇인가…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너무 빠른 오늘을 사는 사람들. 그보다는 자신의 소신이 무엇이며 그러한 것을 꾸준하게 밀고 가는 어떤 신념. 그것을 또 다른 차원의 계산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것도 계산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그러한 높은 계산쯤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립다. 눈앞의 작은, 그러나 분명한 것보다는 막연하나 큰 것을 품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아직은 피가 뜨거운 젊은이라면 말이다.
아뭏든 윤군과 같은 뚝심 좋은 사나이가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다만 서글픈 것은 그러한 얘기가 우리들이 만들어놓은 제도라는 것이 빚어낸 시행착오로서 얘기되어질 때, 그것이 서글프다. 윤군에게는 하나의 빚이 있다. 그대의 뚝심이 대학 4년 동안 어떤 확실한 열매로 맺어져야 한다는 빚이. 아아, 한 젊은이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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