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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2)제72화 비규격의 떠돌이 인생(19)|<제자=필자>김소운|「돌림 애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친구끼리 한 여인을 가운데다 두고 자리를 폈다는 그 심리는 그다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나는 너를 믿는다』『우리는 적어도 시인이다. 여느 시정배와는 다르다』-, 저 스스로를 속이는 젊은 시절의 그런 감점 위장도 있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런 설익은 노릇을 할 까닭이 없다.
황 시인이 밤중에 자던 잠을 깨어 보니 효자는 자기 쪽이 아닌 E쪽을 향해 누웠고, 효자의 한쪽 다리가 E의 아랫도리에 얹혀져 있었다. 물론 두 사람이 다 잠결이요, 의식하고 한 노릇은 아니다.
『이년! 이 더러운 년!』하고, 고함을 지르며 황 시인은 벌떡 일어나서 효자의 아랫배를 걷어찼다. 그 발길이 어느 급소를 어떻게 다쳤던지 유혈이 낭자해서 효자는 그 밤중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자기로 해서 생겨진 사고-.
거기 대해서 책임을 느꼈던 것인지, 몇 주일 동안 입원해 있는 효자를 E는 부지런히 병원으로 찾아 다녔다.
-E가 바로 공초선생 그분이다.
얼마 후에 퇴원한 효자는 공초선생에게로 왔다. 서재 겸 침실의 단간방살이이기는 하나 효자가 갈곳은 거기밖에 없었다. 그러나 A, B, C, D의 어느 경우와도 다른 것은 「애인」으로서가 아니요, 여기서는 「오빠」「누이」의 위치였다는 점이다.
상처 입은 비둘기 한 마리와 「퓨리턴」시인-. 미담일수 있고 가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인들은 그렇게만은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우기 포우 조명희(시집『봄 잔디밭 위』의 저자)같은 이는 성정이 강직한 분이라 공초선생을 위선자라고 해서 두터웠던 친분인데도 그 후 일체 상종치를 않았다.
과연 어느 쪽일까? 수주 변영노씨는 공초·포우 사이를 구애없이 왕래하던 분이다. 그 분은 이 둘중 어느 쪽으로 치부했을까-.
공초가 「퓨리턴」이건, 위선자이건, 그런 것을 굳이 캘 생각은 없다. 그러나 공초 그분의 가슴속에 숨은 내면의 고뇌를 누구라 헤아리랴. 「N·호손」의 『주홍글씨』의 주인공은 자기 스스로 죄인의 표적인 붉은 글자를 제가슴에 새기고는 오랫동안 신도들 앞에서 신의 나라를 선교하던 목사였다. 그가 사랑한 여인-. 그로 해서 낳은 아비를 모르는 자식-.
뒷날, 그 여인과 자식의 손을 잡고 스스로 심판대에 오른 목사는 제 가슴을 중인 앞에 헤쳐서 오래도록 숨겨왔던 그의 죄과를 제 자신이 다스렸다. 어떤 율법보다도 가혹하고 준엄한 방법으로-.
경도 동지사대학에서 종교철학을 닦은 공초-. 뒷날 입산해서 한동안 불법에 귀의했던 공초-, 효자를 만난 뒤 그의 가슴에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았으리라고 누가 단정하랴.
고월 이장희를 추상한 공초선생의 글 속에 이런 대문이 있다.
『나 같은 무위 무능한, 한 마리 기생충만도 못한 놈은 자살이라도 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번씩이나 속에서 복받쳐 오르는 때가 있는데도, 죽지도 않고, 자살도 못하고 무엇 때문에 세상에 붙어 있는지-, 도대체 이런 놈이 도둑놈이요, 죽일 놈의 표본일 것이다….』
이 어찌 일편의 자모만이리오. 공초 그분의 가슴속에 오장을 뒤흔드는 애통과 회한이 숨어 있었기로니 남들은 그것을 알 까닭이 없다.
「오빠」「누이」의 그런 생활이 얼마나 간 것인지를 나는 모른다.
기껏해야 1년 남짓이 아니었을까-. 내가 서울을 떠난 몇 해 후에 풍문에 듣기로는 효자가 대판 어느 「카페」에 몸을 붙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공초선생을 두고는 사과해야할 일, 참회해야 할 일이 한 둘이 아니다. 나는 공초선생께 옳은 후배구실을 하나도 못했으면서도 언제나 준엄한 채귀처럼 매정스럽게 굴었다. 살아있는 동안 두고두고 뉘우칠 이 가책의 멍에-, 피난민으로 북새통이던 부산거리에서 같이 가던 선생이 어느 길목에 와서 『나 신문 찾아올께…』하시더니 나를 길에 세워둔 채 어디론지 가버렸다. 공초선생과 같이 가기로 약속한 시간이 있어 그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던 참이었다. 한참 후에 선생이 영자신문을 손에 들고 돌아왔다. 주거가 일정치 않은 선생에게 누군가가 영자신문을 기증하면서 어느 집을 지정해 놓았던 모양이다.
왜 하필 이런 바쁜 시간에 신문을 찾아야 하나! -그런 생각에서 나는 짜증을 터뜨렸다.
『선생님은 현실생활에 일체 책임을 안지면서 신문은 뭣하러 꼬박꼬박 제날 읽어야 합니까, 그 신문 며칠 모아두었다가 읽으면 썩어버리나요!』
동란에서 30년이 더 지났건만 나는 신문을 펼 때마다 그날의 고슴도치처럼 괴팍했던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자책을 느낀다. 『너는 왜 신문이며 「라디오·뉴스」에 관심을 갖나? 너는 얼마나 현실생활에 책임을 지길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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