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와의 싸움에 수험생들 기진맥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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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7·30」교육개혁조치 이후 처음 실시된 전기대학입시가 26일의 면접을 마지막으로 일단 끝났다.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 예시와 내신성적만으로 신입생을 뽑는 새 입시제도는 과열 과외를 추방, 학교 밖으로 밀려났던 중등교육을 학교 안으로 끌어들이고, 수험생들의 시험부담을 덜어주는 등의 효과는 있었지만 이에 못지 않은 많은 부작용을 드러냈다. 수험생들은 입시과정에서부터 지나친 「눈치」만 배웠고, 수험생의 지망편의를 위해 허용된 복수지망제는 고교 교사들의 진학지도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면접직전까지 진로결정을 못한 채 많은 수험생들은 미로를 헤매야했다. 거기다 대학별로 예상「커트·라인」이 발표됐으나 많은 복수지원자의 성적까지 포함된 것이어서 실질 합격선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 바람에 많은 수험생들은 면접당일 자신의 성적보다 한 단계 낮춰 감으로써 명문대학일수록 정원미달 사태까지 속출했다. 벌써부터 이같은 입시제도는 하루속히 개선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새 대학입시제도는 과연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고쳐야할까. 문교부·대학당국·고교교사·학부모·수험생들의 의견을 들어본다.

<혼란 속의 선택|단판승부>
이번 입시에서 드러난 두드러진 현상은 지망대학·계열 선택의 혼란. 이는 대학입시가 사실상 전기에 끝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재수는 시킬 수 없고 어디든 붙을 수 있는 대학을 찾아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하느냐.』 부산에서 병원을 경영한다는 김모씨(52)는 둘째딸이 예시에서 2백83점을 받았는데 서울대 인문계로 보내야하느냐, 이대로 보내야 하느냐며 25일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며 본사에 자문을 호소했다.
여학생보다 남학생의 경우 재수에 대한 두려움은 더 크다. 올해부터 징병적령이 19세로 낮추어져 바로 대학에 들어가지 않으면 다시 입시를 치를 기회를 갖기 어렵게됐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전반적 과외금지조치로 학관 등에서 공부하기가 어려워졌고, 예비고사가 재학생중심으로 출제되기 때문에 더욱 불리하다.
이와 함께 지난해까지 후기에 학생을 모집하던 서울시내 8개 종합대학 등 전국26개 종합대학과 45개 단과대학 등 71개 대학이 모두 전기에 같은 날 일제히 입시를 치러 선택은 그만큼 어려워졌다.
올해 대학신입생 19만1천1백70명 가운데 88%인 16만7천8백40명을 같은 날 선발, 여기서 실패하는 경우 지원할만한 후기대학이 극히 적다. 『한번 실패하면 1년을 놀 각오를 해야되는데 어느 대학도 안심할 수 없어 불안했다』고 수험생 강모군(18·서울K고 출신)은 실토했다.

<복수지원>
후기 대학들이 모두 전기로 몰리자 문교부는 『수험생들의 학교 선택 폭을 넓혀준다』는 뜻으로 복수지원을 허용했다. 처음 이같은 방침을 정할 때 문교부는 『대학간 복수지원만을 뜻했다』고 했다가 서울대가 14일 원서접수를 시작하면서 대학내 계열·학과간 복수지원도 허용하자 『이전에도 제2지망이 있었지 않았느냐』며 방관, 고대·숙대 등 다른 사립대들도 이에 따라 대학내 복수지원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혼란은 이때부터 가중됐다. 「한 대학이라도 더 많은 원서를, 한 계열 또는 학과라도 원서를 더 내놓고 보자」는 쪽으로 수험생들은 흘러가기 시작했다. 1명이 8장까지 원서를 써가는 사례가 일선 고 교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선택의 폭이 큰 것 같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원서를 내놓은 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모든 지원자는 갈팡질팡이었다.

<허수경쟁>
이 바람에 많은 수험생들은 실제로는 가지 않을 많은 허수경쟁자와 씨름을 해야했다.
「유령인간」과 싸우게되니 실제로 자신보다 상위득점자가 몇 명인지 알 도리가 없다. 이렇게되자 문교부는 최종 시험인 면접전에 각 대학이 계열·학과별로 지원자의 예시성적을 공개토록 했다. 그런데 그것도 복수로 지원한 모든 대학이나 계열·학과에서 합격안전권에 들어있는 극소수의 수험생들에게는 도움이 됐지만 한 곳에서라도 안전권에서 벗어난 수험생에게는 방황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와 함께 예시 고득점자를 많이 낸 일부학교에서는 성적공개를 역이용할 우려도 없지 않았다. 다시 말해 명문대학·인기학과에 고득점자가 모두 복수 지망하도록 해 성적공개결과「커트·라인」이 높게 나오도록 함으로써 이같은 사실을 모르는 다른 학교의 경쟁상대가 아예 다른 대학이나 계열로 옮겨가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계열지향후퇴>
서울대 등이 대학내 복수지원을 허용한 것은 고교교육에 결정적 부작용을 낳았다고 일선고교교사들은 입을 모았다. 『우수학생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로 서울대는 복수지원 허용명분을 밝혔다. 그 결과 학생들은 전공하려고 하는 계열·학과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서울대에 들어가고 보자는 사고방식이 싹텄고, 말하자면 선교 사조를 심어줬다.
여기서부터 고교교사들의 학생에 대한 진학지도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간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수험생들에게 계열·학과에 따라 교수진과 시설을 평가, 지원계열을 선택하게 할 수가 없었다. 서울 S고교 B교사는 『예시성적이 공개되면서는 더욱 섣불리 어떤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만약 실패하는 경우 전적인 책임을 교사가 져야했기 때문이었다.

<눈치·투기조장>
수험생들은 원서접수창구에서부터 옆사람의 성적을 훔쳐봤고 조금이라도 덜 몰리는 창구를 찾아야 했다. 대학을 가겠다는 결심을 할 때 전공을 선택하고 신념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경쟁률이 낮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대학만 찾게 됐다. 더구나 면접전 성적공개방침이 정해지자 눈치보기는 원서접수마감 후까지 연장됐다.
결국 마지막 선택순간이 다가오자 밤잠을 설치며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은 고민했다. 「세곳이 모두 합격권인데 어디로 가느냐」로부터 모두가 「커트·라인」에 걸렸는데 어디로 가면 상위득점자가 많이 빠져나갈까를 계산해야했다.
계산은 간만치가 않았다. 결국 투기심리까지 발동, 「커트·라인」에서 훨씬 미달하더라도 「끝까지 버텨보면 합격권내의 지원자가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친 수험생이 생기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예상「커트·라인」이 2백80점이 훨씬 넘는 대학에도 2백점 미만의 수험생까지 상당수가 합격하는 「난센스」도 있었다.

<불공평한 내신|내신이 결정했다>
올해 입시에서 수험생들의 이동에 따라 정원미달사태가 벌어진 서울대나, 연대·고대 등 인기학과의 예상「커트·라인」이 높았던 계열·학과에서 중도에 빠져나간 사람이 많았던 것은 고교내신성적이 큰 영향을 미쳤다.
고대를 제외하면 서울대나 연대·이대·서강대·숙대 등 모든 대학이 지원자성적중 예시점수만 발표했다. 그런데 「커트·라인」에는 동점자가 심한 경우 1백 여명이 몰려 모집정원의 20∼30%에 이르기도 했다. 내신이 문제였다. 그런데 내신점수가 합산될 경우 불안한 수험생은 모두 떠나버렸다.
서울대 법대의 경우 모집정원이 3백64명, 예시성적에 따른 「커트·라인」은 정확히 3백6점이었다.
예시에서 3백6점을 얻은 수험생이면 모두가 고교내신도 1급으로 만점을 받았을 것으로 성급하게 판단한 수험생들은 3백5점이라도 떠나버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3백6점을 받은 수험생가운데도 내신성적이 만점이 아닌 수험생도 적지 않았다.
이 바람에 결국 서울대법대도 정원미달사태가 나 버렸다.

<내신등급 불공평>
내신등급이 불공평하다는 불평은 예시고득점자일수록 높다. 3백6점으로도 내신에서 1급을 못받을 경우 서울대에서는 1급이 내려갈 매마다 3점씩 감점 당해 결국 합격권에서 탈락하게 된다.
올해 대입예시를 기준으로 보면 합격자 54만 여명 중 상위4%(1급)는 2백60점. 평균 2백60점이면 1급에 해당한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예시 3백6점을 받고도 고교에 따라서는 내신 1급이 될 수 없다는데 대해 수험생들은 승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같은 현상은 전국의 고교가 평준화되지 않은 점을 무시한 채 학교별로 상위4%에 대해서만 무조건 내신1등급을 주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고교내신성적 중 10%를 차지하는 출결점수에도 문제가 많다. 병으로 인한 결석은 감점을 않지만 앓으면서도 학교에 나왔다가 조퇴하는 경우는 감점을 시키고 있다.
동점자가 「커트·라인」에 몰려있는 것이 명백해진 성적공개결과를 보더라도 결석으로 인한 1점 감점이 수험생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생각할 때 이는 재고돼야 한다는 것이다.
내년부터는 내신성적을 전체 점수의 30%이상 반영토록 돼있다. 올해 이같은 수험생들의 불만을 거울삼아 내신평가에 합리적이고 타당한 기준이 새로 마련돼야 하겠다.
각 고교에서의 내신평가에도 교사의 주관이 개입돼 학부형과 분쟁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체육·음악·미술 등 주관적 평가가 불가피한 때엔 더욱 그렇다. 따라서 학교간의 학생성적격차에서 오는 내신성적의 불공평처리를 막기 위해서는 내신평가를 위한 연합고사도 고려해 볼만하다고 교육관계자들은 말하고 있다.

<예시성적 공개|대학서열이 예시점수로>
지원자 예시성적 공개로 전국 71개 전기대학의 서열이 정해지게 됐다.
단일척도에 의해 대학서열이 이처럼 드러나기는 처음 있는 일이다.
최종 면접순간 정원미달사태로 약간 뒤바뀌긴 했지만 본고사를 없애고 지원서하나로 입학생을 선발하는 제도가 되자 서울대 집중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3백점 이상 고득점자가 서울대에만 2천5백62명(복수지원 포함)이 지원했다. 연·고대는 복수지원을 포함하더라도 1백명을 크게 넘지 않았고 이대·숙대에는 1명도 없었다.
이렇게되자 일부대학이나 계열·학과의 재학생들도 불평이 많다.
『대학생들에게 자존심을 송두리째 뺏어가는 이런 제도가 어디 있느냐』고 J대1년 송모군(20)은 투덜댔다. 특히 지난해까지 후기모집으로 전기에 실패한 비교적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몰리던 S·H·D대학생들의 불만은 더 크다. 『전기대에서 실패했다는 「콤플렉스」때문에 괴롭기는 해도 대학생활에 정착하는 이때 그처럼 대학당국이 「커트·라인」을 공개해 대학끼리 비교해야하느냐』고 했다.
이대의 경우 재학생이나 새로 들어올 신입생들의 「프라이드」를 위해 좋지 않다고 처음엔 공개를 거부하다가 뒤늦게 이를 공개해 재학생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권순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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