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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서정주씨 부인 방옥숙 여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나 바람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놓은
삼천 사발의 냉수물.
내 남루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한국인에게 널리 애송되는『국화 옆에서』의 시인 미당 서정주씨(66).
한국 시단의 큰 산맥 미당에게는 앞에 소개된 그의 시『내 아내』에서 냉수 냄새로 비유된 지난40여년을 해로 해온 부인 방옥숙 여사(61)가 있다.
관악구 사당동의 예술인 마을. 회색 기와를 이은 아취 어린 둥근 담의 서 시인 댁의 작은 뜰에는 한겨울에도 푸른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드러낸 모과나무·앵두나무·대추나무들도 어깨를 비비고 들어서 있다.『젊어서는 그분의 방랑벽 낭비벽 때문에 참 눈물 많이 흘렸어요. 갓 혼인을 해서도 훌쩍 집을 떠나면 서울로, 만주로 헤매시며 몇달이 가도 소식 한 줄 없어요. 후에는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해서 월급날에도 빈 봉투만 남아 가난에 많이 헤맸어요』
살림살이를 몰라라 할뿐 아니라 때로는 당치도 않은 신경질로 자신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아내와 자식을 몰라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를 떠나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고 방 여사는 회상한다.
미당의 부친이 정읍에 들렀다가 우연히 담 너머로 방 여사를 보고 며느리 감으로 점찍은 후 사람을 넣어 진행시킨 혼담으로 맺어진 부부라 맞선은커녕 혼례 전에 서로 얼굴 한번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진만을 교환했는데 두루마기를 입은 우락부락한 인상에 괜히 마음이 끌리더군요. 그분은 제 인상이 할마씨 같더라고 그래요. 나중에 들으니 서울에서 신식여자와 연예하다 여자가 싫다고 떠났다나 봐요』꾸밈새 없이 후덕한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방 여사는 얘기한다.
광주학생 사건이후 일제에 대항하는 학생운동에 참가하여 고향의 고창 고보에서 퇴학을 당하고 실연까지 하여 방황하는 아들의 마음을 잡아 보려고 시아버님이 서둔 결혼이었다는 것이다.
38년, 결혼 당시 미당은 26세, 방 여사는 19세였다. 결혼 후 고창 시댁으로 들어가 5남매의 맏며느리로 시집살이를 하다 큰아들(승순)이 태어나 돌이 지나자 미당은 서울 행촌동에 방 하나를 얻어놓고 가족을 데리러 왔더라고.
몇 년 후 미당은 작고한 부친의 유산으로 흑석동에 집 한 채를 마련했으나 술값으로 날려보내고 해방, 6·25를 맞으면서 국민학교 교사, 신문기자를 지내면서도 갖은 생활고를 겪었다고 한다.
동란 중 광주에서는 미당이 신경쇠약 늑막염 등 질병의 고통까지 겹쳐 지난 반생 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보냈다.『그분이. 50이 넘으면서부터는 직접 월급을 받으러 다녔어요.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어요 (동국대 대학원 명예교수). 지금은 돈은 모두 제게 맡기고 용돈을 타 쓰시지요』이렇게 하여 얻은 경제적 안정으로 오늘 살고있는 집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이 많은 시인으로 따르는 여성이 많은 까닭에 속을 태운 일도 적지 않으나 지금 돌이켜 보니 별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결국은 진실이 이기는 것 같다』고 방 여사는 얘기한다.
요즈음은 육식을 안 하고 까다로운 미당의 식성에 맞춰 철 따라 음식을 장만하는 것이 큰일이다.
간장 된장도 손수 담고 철 따라 멸치젓 꼴뚜기젓 어리굴젓도 담는다. 제철이면 영광 굴비, 순창 고추도 직접 현지에 가서 사 들인다. 이 일을 방 여사는 커다란 기쁨으로 하고있다.
『때로는 청탁받아 쓰신 시나 수필을 읽어 주시는데 감동이 갈 때가 많아요. 남들처럼 자상치는 않아요. 전부를 잃어버리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해온 것을 존경합니다.』
지난 79년에 해외 첫 나들이로 세계 일주를 떠난 미당과 귀국 길에 만나 대만·일본을 여행했던 것이 지난 반생 중 가장 큰 호사였다고 방 여사는 얘기한다. 서 시인과의 사이에 승해씨(41·소설가·미국「노드·캘리포니아」대 교수)와 윤씨(24·서울대)가 있다. <박금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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