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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0)제72화 비관격의 떠돌이 인생-김소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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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머니를 찾아서>
동전 6전의 굴욕감에서 고모님 댁을 뛰쳐나온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을 꾸짖어도 보고 미워도 해 본다. 얼마나 귀염성이 없었으면-, 그러나 어린 내 가슴에는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운 「주림」이 있었다. 거짓 아닌「진짜」-그 진짜가 한없이 그리웠다.
아침에 고모부가 나간 뒤면 고모님은 벽장에서 꿀 항아리를 내어 숟갈로 뗘서 내 입에 가져온다. 나는 그 숟가락을 받아 쥐고 고모님 입으로 도로 가져간다.
고모님의 그 호의를 그냥 거절하기가 미안해서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지만 단 한번도 나는 어린애답게 그 꿀 숟갈을 받아먹은 적이 없었다(고모님은 내 나이 50이 넘도록 그 얘기를 남 앞에서 되풀이하면서 어린 시절의 내 고집불통을 선전했다).
어린 내가 꿀을 싫어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왜 고모부가 없을 때만 꿀 숟갈을 내 입에 가져오는 것일까. 마치 훔쳐 먹이듯이 하는 고모님의 그 특별「서비스」가 내게는 부담스러웠고 떳떳하지 못했다.
내가 집을 나온 다음날은 김해 보통학교의 운동회 날이다. 고모부는 그 운동회에 나를 위해서 적지 않은 돈을 기부했다고 했다.
자랑삼아 그런 생색을 내는 고모부며 남편의 눈을 피해서 내게 꿀 숟갈을 내미는 고모님의 그 애정이 내게는 모두 진짜 아닌 가짜로 보였다. 더구나 내 고집에 못 이겨「어머니」 「아버지」로 부르지 않아도 좋다고는 했지만 그들의 그 요구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아버지」「어머니」로 부를 날이 있겠지 하는 은근한 기대-, 그러나 어림도 없다. 내 입으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여담이 되지만 「덴마크」의「뭉크」라는 목사-저항운동의 기수로 「나치스」의 총검에 죽은 그「뭉크」목사의 전기를 언젠가 저자인「야마무로·시즈까」(산실쟁)씨가 보내 왔다. 그 중에「뭉크」목사가 어린 시절 역시 부모없는 고아로 고모 집에 양자로 들어갔다가 어른들이 시키는「어머니」「아버지」소리가 아무리 해도 입 밖에 나와주지 않아 혼이 났다는 한 귀절이 있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도 닮은 이야기인데다가 어린애답지 않은 고집불통이 나 하나만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은 안심이 갔으나 한가지 다른 것은「뭉크」는 고모내외가 사준「크리스머스·트리」에 매수되어 마침내는「아버지」「어머니」로 부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게는 그런 귀염성은 없었다.
가짜 아닌 진짜는 진해에 사는 조부모님, 그러나 거기로 돌아갈 사정은 못 된다. 집을 나온 나는 육로로 70, 80리 길을 걸어서 전산으로 갔다. 거기엔 삼촌이 살고 있었지만, 내가 찾아간 곳은 삼촌댁에 자주 드나들던 제주태생의 청년- (지금은 이름도 성도 잊었지만). 그 청년 집이었다. 그 청년이 동경 유학 때 선배로 사귀던 진남포의 김엽이란 인물(그는 가업인 재목상 관계로 「아라사」와 자주 내왕이 있다는 얘기를 언젠가 삼촌과의 대화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곁에서 그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를 그 청년 집으로 가게 한 것이다.
진남포로 가서 김엽이란 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아라사」로 가는 길 편이 얻어지리라-. 홍서리로 구름을 잡는 것 같은 막연한 얘기인데도 방기(?) 8세의 내 어린 지각으로는 그 길 하나밖에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얼굴조차 잊어버린 어머니-, 그 어머니만이「진짜」로 여겨졌다. 어머니가 그리워서라기 보다는「진짜」가 그리웠다. 그 제주도 청년은 평소부터 이것저것 내게 마음을 써주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찾아간 나를 반가와 하면서도 내 무모한 계획을 단념시키려고 백방으로 타일렀다.
마침내 그의 말대로 영도 사는 삼촌에게 가기로 마음을 먹고 그 청년과 같이 나룻배를 탔다. 그러나 8t짜리 발동선 나룻배가 영도에 가까와지자 내 결심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사길단 삼촌에게는 안 가겠다고 버티었다.
66, 7년이 지난 옛날 일이라 더러는 기억이 흐려졌지만, 나룻배 위에서 그 청년의 손을 뿌리치며 온 길로 되돌아가기를 간청한 장면만은「하이라이트」처럼 똑똑히 기억에 남아있다.
울음을 터뜨리면서 필사의 저항을 하는 내 서슬에 그 청년도 마음이 움직였는지, 타고 갔던 나룻배로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 다음날 나는 그 청년의 소개장과 현금 2원, 그리고 그가 사준 차표로 진남포로 떠났다.
서울을 지나 평양까지는 꼬박 1서야가 걸렸다. 평양서 역부가『헤이죠오, 헤이죠오』하고 역 이름을 일본말로 외치는 것이 가슴이 메도록 구슬프게 들렸다.
거기서 기차를 바꿔 타고 진남포까지 가서 「관서 재목 상회」라는 기다란 간판이 달린 김씨의 회사를 찾아갔으나 공교롭게도 김씨는 출타하고 없었다.
두어 주일이 지나야 돌아온다고 한다. 김씨가 간 곳이 어느 외국인지 국내 어디메인지. 거기까지는 어린 내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두 주일은 고사하고 두 달이 걸려도 김씨를 만나야만 한다. 회사 사람이 데려다 준 주막으로 가서 김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내가 김해를 떠난 다음날「아라사」에서 어머니가 보낸 사람이 고모님 댁으로 찾아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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