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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얼굴의 경제] 개인 신용정보, 온정주의 시선으로만 볼일 아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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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호 21면

KB국민은행 여의도지점 직원이 대출을 받기 위해 찾아온 직장인 고객과 상담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길을 걷는데 어떤 사람이 딱한 모습으로 다가와 “지갑을 분실했는데 차비하게 만원만 꿔주실 수 있을까요?” 한다면 선뜻 빌려주겠는가?

⑭ 개인 신용평점은 나의 까칠한 친구

본인이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열심히 주장을 해도 대부분은 그냥 지나갈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나의 옛 친구라면 완전히 다른 장면이 전개된다. 흔쾌히 지갑을 꺼낼 뿐 아니라 안부도 물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대출을 위해 또는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러 은행에 갈 때 미국대사관 비자서류 준비하듯 졸업증명·재직증명·납세증명·잔고증명·가족관계증명 등을 준비하지 않는다. 그냥 가서 신분증만 제시하고 신용조회에 동의하면 나를 대신해 누군가가 나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불과 1~2초 만에 은행원 앞 PC화면에 띄워준다. 이 일을 하는 회사가 개인신용평가회사(Credit bureau)이다.

통계모형으로 객관적인 신용평점 구해
은행원은 화면을 보면서 친숙한 사람을 대하듯 상담을 하고 대출 여부, 적용 금리 등을 알려준다. 이렇게 신속하게 진행되는 것은 언제 얼마를 빌려 어떻게 갚았고 현재 상태는 어떠하다는 각종 정보, 즉 신용에 관한 이력서가 CB사 컴퓨터에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용관련 정보를 종합처리해 전용망으로 보내는데 드는 비용은 자판기 커피 한잔 값이다. 여기엔 신용평점같은 추가 정보도 담겨있다. 이는 한국의 인프라가 뛰어나기도 하지만 실사를 거치지 않고 통계모형으로 신용도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신용평점이란 사람들이 돈을 빌린 후 얼마나 잘 갚을지를 점수화하여 상대적 순위를 매긴 것이다. 즉 연체 가능성을 평가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기준은 향후 1년 이내 90일 이상의 연체이고, 현재 부채수준과 그간의 상환 이력, 거래기간, 거래유형, 연체기록 등이 주요 결정요인이다.

수 많은 사람을 데이터를 이용한 통계모형으로 평가하므로 허점도 많다. 금융사로부터 돈을 전혀 빌리지도 않고 신용카드도 사용하지 않았다면 CB사에는 아무런 기록이 남을 수 없어 신용이 없는 것과 동일하게 된다. 미국의 현지 법인장으로 부임해 미국의 시티카드를 이용하고자 하였지만 신용거래기록인 CB파일이 없어 발급이 거부된 경우도 있다. 필자도 미국 유학시 550달러를 예금하고 이를 담보로 500달러를 대출받아 1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는 과정을 통해 CB파일을 만들어 카드를 발급받았다.

재미있는 사례도 있다. 남편이 먼저 미국에 가서 집값의 반을 현금으로 내고 집을 샀다. 나머지 반은 고금리로 차입하였기에 신용이 좋아지면 저금리로 갈아타고자 매번 30달러씩 수수료를 내고 자신의 신용도를 조회했다. 하지만 어느 날 신용평점이 대폭 하락한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부인이 미국에 와 백화점에 가서 “오늘 저희 백화점 카드를 발급받으면 할인 혜택을 드립니다”란 광고를 보고 여기저기에서 카드를 여러 장 발급받았던 것이다.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지만 컴퓨터는 자금 사정이 어려워져 카드 돌려막기를 하려는 사람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다.

대부업체도 정보 공유 참여해야
법정에서는 10명의 죄인을 풀어주는 한이 있어도 1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말라고 하지만 신용평가는 다르다. 100명 중 한 명을 연체로 이르게 한 사례가 발생하면 불량률이 1%를 웃돌아 1등급에서 5~6등급으로 추락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CB산업도 그간 꾸준히 변해왔다. 과거에는 연체나 부도 등 불량정보만을 공유하고 이자와 원금을 착실하게 잘 갚았다는 사실은 고객독점 차원에서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이른바 카드대란을 겪고 대형 금융사들이 대승적 차원에서 먼저 합의하고 모든 금융사에 문호를 개방해 우량정보까지 공유하는 선진 시스템을 구축했다. 우량 정보를 공유함에 따라 금융사는 고객에 대한 변별력이 증대되어 대손충당금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고객들은 금융사를 제대로 쇼핑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A은행과 오래 거래를 해왔는데 좀 더 좋은 조건이 가능한지 B은행에 알아보고 싶다면 CB사가 B은행에 A은행과의 거래실적을 알려준다. 은행에 비해 불리한 여건에 처했던 개인고객의 교섭력이 크게 향상된 것이다.

정보의 공유는 담보도 없고 달리 내세울 것이 없는 저신용자에게 본인의 신용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다리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대부업체로부터 돈을 빌려 중고차를 사서 채소배달을 시작했다고 하자. 성실하게 일한 결과 원금과 이자를 다 갚고 단골도 많이 생겼는데 차가 낡아 새 차를 사려면 과거에는 다시 대부업체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금리의 대부업체 대출을 제대로 갚았다는 기록이 있다면 저축은행이 훨씬 낮은 금리로 대출을 해 줄 터이고 다음에는 은행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용의 사다리가 작동하려면 정보가 흘러야 한다. 대부업체가 CB사에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고 광고하는데 당장은 프라이버시를 지켜줄지 모르지만, 금융 소비자 입장에선 금리가 낮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치우게 된다는 점도 정책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파산 면책 정보 10년간 보관
사회적 약자를 배려가 강조되다 보니 정보 이용에 제약이 커지고 있다. 개인파산 면책확정 후 기록보존 기간을 1년 또는 1개월 이하로 축소하자는 주장도 있다. 현재 90일 미만의 단기 연체 이력은 3년, 90일 이상의 장기 연체는 5년간 보존되고 있다. 국제적으로 7년이 상례다. 미국의 경우 파산 면책 정보를 10년간 보관이용한다. 모럴 해저드를 막기 위해서다.

인권 향상 측면에서는 바른 방향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변별력이 약화함에 따라 금융부실이 증가하고 신용질서가 흐트러지는 등 사회적 비용이 우려된다.

세계적으로 속도 위반을 하면 자동차 보험료가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속도 규정을 지키지 않는 차가 사고를 자주 크게 낸다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입증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에 맞춰 보험료를 조정하는데 에도 오랜 시일이 걸렸다. 그 결과 선량한 운전자의 보험료가 올라가고 과속운행한 차로 인해 생명을 잃는 비극이 줄어들지 않았다. 과속 운전자 당사자 역시 사고 피해를 보기도 한다.

개인신용평가에서도 근시안적인 온정주의에 기반한 포퓰리즘이 득세한다면 금융의 효율성이 저하되고 은행 부실의 위험이 커질 것이다. 또 거래 당사자 역시 적시에 필요한 경고를 받지 못해 더 큰 불행에 빠지게 된다.



최범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 전 KDI 연구위원. 신한아이티스 대표 역임.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자문관으로 금융 구조조정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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