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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1. 아나키스트의 이상과 좌절-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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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을 도운 일본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아나키스트였습니다.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는 아나키즘은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구조를 비판합니다.

박노자 교수는 아나키즘을 사회주의의 한 갈래로 인식하면서, 식민지 시절 아나키스트들은 이념.국경.민족의 경계를 넘는 실천을 선보였다고 평가합니다. 나아가 그들의 꿈이 좌절됐을지라도 그들의 실천이 있었기에 전후(戰後) 일본의 민주주의도 가능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1923년 일왕 폭살혐의를 받고 구속된 아나키스트 박열(左)과 그의 일본인 아내였던 가네코 후미코. 1926년 감옥 독방에서 의문의 자살을 한 그녀의 유해는 현재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혀 있다.

허동현 교수는 박교수와 달리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는 다르다고 하면서, 아나키스트의 이상과 꿈을 기업가 유일한과 정치가 장면과 비교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좌.우의 경계를 넘어 박애를 실천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자는 제안입니다.

1990년대에는 많은 사람이 마치 유행처럼 사회주의의 실패를 이야기했습니다. 동유럽권 몰락에 이어 89년 천안문 사태로 중국 공산당 권력의 살인적인 탄압성이 전세계에 알려졌고, 북한의 기아 사태가 한반도에서 병영식 사회주의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사회주의가 군사주의적 근대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권력집단의 이데올로기로 왜곡되면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진정한 사회주의적 이상과 거리가 먼 사회를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아직까지-평등과 박애에 입각한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지 못했다 해서 극동 사회주의의 역사를 무조건 실패작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요?

약육강식의 세계를 초월하려 한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비록 이상향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 구도(求道)의 길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얻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경과 국적을 뛰어넘는 사해동포적 인류주의의 이상과 실천입니다.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한 갈래로 인식됐던 아나키즘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은, 근대의 가장 무서운 독약인 폐쇄적인 국가 중심의 민족주의에서 상당히 탈피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컨대 한문을 익히는 유생으로 시작해 1964년 한국민주사회주의 연구회를 만드는 등 한국적 사민주의(社民主義) 발전에 크게 기여한 독립운동가 정화암(鄭華巖:1896~1981)은 1932년 윤봉길의 거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중국인 동지의 소개로 알게 된 일본인 종군기자를 통해 천장절(天長節.일왕의 생일) 기념식에 나올 놈들의 명단과 식순을 쉽게 입수했어요. …(거사가 성사되고 나서) 그 일본인 기자가 비를 맞고 뛰어들어오면서 너희 성공했다, 너희 성공했다 하는 겁니다. 무엇이 성공했느냐 했더니 터졌어, 터졌어. 상해 방면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이 폭사하고 제3함대 노무라 사령관이 눈알이 빠지고 …이 친구는 일본인 종군기자이면서도 은근히 우리 계획을 눈치채고 성공을 바랐던 겁니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김학준 편집, 3백26~3백27쪽).

일본이 군국주의적 열풍에 휩싸였던 30년대에, 일본인으로서 조선인들의 독립투쟁을 이처럼 도와주고 반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당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극소수의 젊은 인텔리겐치아들은 일본 군벌이 받은 타격에 대해 조선인보다 더 기뻐했습니다.

정화암이 그 일본인을 신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정화암 자신이 발기인이었던 비밀 무정부주의 조직 남화(南華) 한인(韓人)청년 연맹(1931년 11월 결성)에서 이미 두 명의 일본인 동지가 일제에 맞서 함께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정화암과 그 동지들이 사용했던 암살이라는 운동방법은 무자비하고 미숙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1920~30년대 극동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배울 점은 바로 이와 같은 초(超)국가주의.초(超)민족주의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 잘 보여준 인물이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1902~74)과 함께 일왕을 암살하려다 투옥돼 감옥에서 변시체로 발견된 박열의 일본인 연인이자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입니다.

물론 허동현 선생님께서는 대다수가 국가주의의 환상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소수의 사람이 깨어있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사회주의에 입각한 소수의 보편주의적 자각은 30년대에는 일본 군국주의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전후(戰後) 일본의 민주주의 심화에 크게 공헌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와 관련된 사건들만 보아도 70~80년대 김대중 구명운동을 벌였던 사람이나, 일본 교과서의 역사 왜곡에 맞서 싸우는 사학자와 시민들은 대개 좌파에 속하거나 좌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들이 일본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기에 일본이 지금까지 전후의 평화주의적 헌법을 고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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