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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선희의 시시각각

삼성전자의 '좁쌀' 쇼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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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양선희
논설위원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는 전자산업의 ‘격렬한 한때’였다. D램 반도체 호황의 끝물을 맞아 업계는 글로벌 구조조정에 돌입했고, 2001년 하이닉스 반도체가 미국 업체와 매각 협상을 벌이던 전후로 치킨게임은 극에 달했다. 이 와중에 내로라하던 일본 D램 업체들과 대만 업체들은 사업을 철수했고, 국내에선 하이닉스 사수에 소액주주들까지 나서기도 했다. 전쟁처럼 지독했다.

 한데 그 전쟁에서 삼성전자는 홀로 비껴나 있었다. 1달러를 밑도는 D램 가격에 도처에서 비명 소리 낭자한데 삼성전자 영업 임원은 “이 전쟁을 더 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낸드플래시를 들고 나왔다. 모바일 기기용 메모리다. 당시엔 이런 기기의 개념조차 생소했던 터라 “곧 손에 들고 다니는 ‘포터블 컴퓨터’ 시대가 오면 낸드플래시 시대가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알쏭달쏭했다. 그들은 이렇게 한발 앞서 시장을 장악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디지털 시대 글로벌 주인공이 됐다. 막강 아날로그 기술을 가졌던 일본 전자업계가 미련을 못 버려 미적대는 사이 디지털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거칠 게 없었다. 아날로그에선 가진 게 없으니 신기술 시장에서 발목 잡힐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샤오미(小米) 쇼크’로 업계가 다시 술렁인다. ‘좁쌀’이라는 뜻의 중국 스마트폰 업체 샤오미가 중국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끌어내리고 1위를 차지했단다. 이로부터 삼성전자 위기론은 표면화됐다. ‘잘나가는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착시 현상’이라는 말이 시장에 떠돈 지 오래인데 마침 샤오미에 일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삼성전자는 진짜 사계(斯界)의 맹주로서 비전과 실력을 보여줘야 하는 길목에 선 것이다.

 한데 삼성 스마트폰이 약한 모습을 보이자 ‘디스(diss)’도 나온다. 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삼성 스마트폰의 성공 신화는 SKT가 써줬다”고 했다. 애플 아이폰 출시 당시 SKT가 아이폰의 한국 내 파트너 되기를 포기하고, 갤럭시를 6개월이나 기다려 주고, 처음으로 줄 서기 개통을 시킨 장면이 세계 언론에 보도되며 갤럭시 신화가 시작됐다는 거다. 최태원 SK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의리’가 낳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샤오미는 ‘짝퉁 아이폰’으로 불린다. 중국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한데 한 IT전문가는 “잘 베꼈다”고 했다. 20만~30만원대에 성능은 아이폰급이어서 국내 소비자들도 해외 직구로 들여온다. 또 소프트웨어가 삼성보다 낫다는 평도 나온다. IT전문가들은 “샤오미의 진정한 경쟁력은 소프트웨어에 있다. 삼성전자엔 없는 것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레드오션이 된 스마트폰 시장에 경쟁자 하나 더 늘어난 게 무슨 대수인가. 당연히 예견하고 준비했어야 할 일이다. 진짜 문제는 그 뒤를 받쳐주는 과거의 ‘낸드플래시’가 뭐냐는 질문에 삼성전자가 답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삼성전자는 ‘비상경영’을 외친다. 임원 출장 때도 이코노미석을 타고, 인원을 재배치하는 등 한마디로 ‘허리띠를 졸라매자’다. 대기업이 허리띠를 졸라매면, 협력업체는 비명을 지른다. ‘원가절감’은 협력업체 납품가격을 후려쳐서 만들어진다. 이에 모두 심리적으로 오그라든다. ‘베끼는 경쟁력’으로 한몫 보던 과거에 흔했던 장면의 재생이다. 시장은 포스트 디지털 혁신 방안을 묻는데, 농경시대적 근면과 성실로 위기를 돌파하겠다고 답하는 형국이다.

 ‘들판에 나온 호랑이는 개도 무시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삼성전자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들판에서 개들과 먹잇감을 다툴 것인지 웬만큼 뜯어먹은 먹잇감은 던져버리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산중 왕국을 지킬 것인지 결정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중국 기업이 무섭다 해도 베끼는 경쟁력으로 돈은 벌 수 있지만 시장을 리드할 수는 없다. 시장이 삼성전자에 기대하는 건 창의적 리더의 길이다. 10여 년 전의 배짱과 패기를 다시 보고 싶다.

양선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