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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1화 경기 80년 입학·졸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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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일고보는 우리나라에서 관립학교로는 제일 먼저 개교했고, 또 설립당시부터 『조선에 유위한 인재를 기름』을 그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교육·시설등 모든 면에서 비교적 충실한 교육을 실시했다. 자연히 설립초부터 전국에서 이렇다할 수재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특히 한일합방이후 신교육에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져 여간 실력이 있는 학생이 아니고서는 제일고보에 입학하기가 어려웠다.
1914년만 해도 모집정원 2백명에 1백36명이 지윈해 그중 1백15명이 입학할수 있었으나 그 이듬해인 1915년에는 지원자가 갑자기 늘어 2백40명 모집에 1천3백20명이 지원하는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1918년엔 입학정원은 40명이 줄어 2백명이 됐으나(그후 줄곧 2백명선 유지)지원자수는 1천2백40여명으로 큰 변동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높은 경쟁률을 유지했다.
1922년 5년제 고보가 되면서부터 제일고보의 입시전형은 큰변화를 겪었다. 그때까지는 정원2백명중 반수는 출신보통학교장의 추천만으로 입학이 가능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지원자 모두가 입시를 치르도록 하는 완전경쟁제로 바뀌어 입시경잴쟁이 훨씬 치열해졌다.
그러나 당시는 비단 제일고보뿐아니라 한국인으로서 고보에 입학하기란 극히 어려운 형편이었다. 한국인을 받아들일 고보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1919년 5월말 현재의 통계룰 보면, 한국인을 위한 고보수는 모두 12개(공립5, 사립7)에 학생수는 3천1백54명, 여고보수는 6개(공립2, 사립4)에 학생수 6백87명에 불과했다.
이는 인구비로 볼때 대략 인구 7천명당 1명꼴로 당시 한국에 나와있는 일본인의 1백13명당 1명과는 전혀 비교도 안될 정도의 적은 숫자였다. 『한국인에게도 일인과 같은 교육을 실시한다』고 한 일제식민교육정책의 기만성을 엿볼수있게 한다.
당시 제일고보의 입학선발 과목은 조선(26년부터 없어짐)일어·산술이었고, 보통학교 수학연한이 6년에 미달된 자에 한해서만 따로 특별 검정시험이 부과됐다.
물론 입시에는 학과시험 외에도 신체검사·구술시험이 있었고, 특히 27년부터는 출신학교성적과 학교강의 소견표를 제출토록해 합격판점에 중요한 자료로 삼았다. 이런 조치들은 당시 맹휴문제로 골치를 앓던 학교당국이 소위 「품행이 방정한학생들」을 가려내기 위해 취한 조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제일고보에 입학이 돼도 5년의 정규과정을 제대로 마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2백명을 모집하기 시작한 1922년에 입학한 학생들이 27년 즐업할 당시졸업생수는 겨우 1백3명으로 반수 가까이가 탈락하였고, 내가 입학한 25년도의 경우도 2백26명 입학에 1백5명만이 졸업했다.
입학인원중 반수정도만 졸업하는 경향은 20년대 말까지 계속됐는데 28년에는 1백16명, 29년에는 1백5명. 30년에는 1백11명이 졸업했다. 이런 추세는 31년부터 점차 달라져 이때부터는 대체로 1백50명선을 유지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2O년대의 이같은 졸업생 감소의 주요 원인은 잦은 맹휴와 6·10만세사건, 광주학생운동등 큰 사건 때문이었다. 그 주요한 이유를 꼽아보면 대략 다음 세가지 정도로 요약될수 있을 것이다.
첫깨로 당시 제일고보는 학사행정이 매우 엄격해 학업성적이 불량할 경우. 예를 들어 한학년에서 거듭 낙제했을때는 가차없이 퇴학시키는등의 학사징계룰 내렸다는 것이다.
둘쩨로 주로 경제상의 이유인데, 당시는 세계적으로 경제공황이 크게 만연해 그렇지앓아도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허덕이던 우리나라의 경제가 더욱 악화됨으로써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속츨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27년 맹휴때 학생들의 요구사항속에 『기숙사 시설을 고쳐 빈한한 학생들을 수용, 구제할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들어있던 것에서도 당시학생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입학시험에서 학부혐의 학비부담 능력을 평가해 이를 합격에 반영하려하기까치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물의률 빚기도했다. 급기야는 총독부 학무국과 경기도청에서까지 간여해 이의 실시룰 철회하라는 지시률 받은 일까지 있었다.
마지막으로 역시 가장 큰 이유로 맹휴,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등의 사퇴운동에 간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구속돼 조사를받고 또 이때문에 학교에서 징계를 받음으로써 부득이 학교를 떠나야 했던일이다.
아뭏든 제일고보는 들어가기도 어렵고 또 졸업하기도 어려운 때가 었었다. 아마도 내가 다니던 25년부터 29년까자가 그 도가 가장 심했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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