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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5)제71화 경기 8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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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일 합방이후 경기는 한국교육의 총본산으로 발돋움했다. 합방직후인 1910년 10월11일에는 수학원학생을 경성고보의 해당학년에 수용했다. 수학원은 원래 영친왕 이은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왕궁에 설치된 특수학교로서 귀족의 자제만 입학이 허용되었던 곳이다. 그러나 영친왕이 1907년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게 되자 수학원은 사실상 그 존재의의를 상실했다. 합방과 동시에 이를 폐지하고 그곳의 재학생의 교육을 우리학교에 위탁한 것은 경기가 한국의 대표적 교육기관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향학열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 당시 이왕가 집안의 자제로서 정진세·이기종군이 우리 반에 전입해 함께 졸업(9회) 했다. 또 조선교육령실시와 동시에 폐지된 관립한성 외국어학교도 분교에 병합해 그 재학생을 해당 학년에 편입시켰다. 외국어(영어)학교에서 전 입학한 학생 중에는 내 사촌인 정구영과 이희승이 있다. 계산소학교 졸업후 외국어학교에 입학했던 정구영은 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다가 우리학교에와 갑자기 일어를 배우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또 학교분위기도 달랐기 때문에 정구영은 중도에 그만두고 경성전수(법률)학교로 옮겨 법조인으로의 길을 밟았다. 이희승 역시 1년을 다니다 중화학교로 옮겼기 때문에 두사람 모두 경기졸업생명단에는 올라있지 않다. 또 관립 한성사범학교가 폐지되자 이를 계승하기 위해 우리학교에 임시교원양성소 및 부속 보통학교가 부설되었다. 그리고 1913년 3월 부설 임시교원양성소를 한국인 교원을 양성하는 제1부와 일인 교원을 양성하는 제2부로 나눴다. 그러나 이해 4월1일 보통학교의 한국인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수업 연한 1년의 사범과가 설치되자 부설교원양성소는 1,2부 구별 없이 일본인 교원만을 양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말의 각종학교가 통합되어 우리학교는 갑자기 번창하게 되었다. 교직원 60명. 본교생·임시교원양성소·부속보통학교를 포함한 학생수 1천2백여명으로 경성고보는 1910년대 한국교육의 총본산으로서의 기능을 다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학교에 대한 총독부의 관심은 컸다.
역대 총 독은 반드시 한번은 경성고보에 들러 수업을 참관했다. 1913년 11월15일 초대총독 「데라우찌·마사따께」(사내정의), 18년 2월19일 2대총독 「하세가와·요시미찌」(장곡천호도), 22년 9월13일 3대총독 「사이또·마꼬또」(재등상), 34년 12월 4대총독 「우가끼·가즈시게」(자원일성)등이 이 학교 를 시찰했다. 뿐만 아니라 본교는 한국의 모든 교육기관 가운데 제1의 VIP시찰 「코스」로서 영친왕 이은도 1918년 1월 수업을 참관했다. 그는 일본으로 끌려가기 직전인 1907년에도 당시 한성고보를 방문한 일이 있다. 금테 두른 모자, 군복허리에 다리보다 긴칼을 찬 망국의 왕자를 맞는 학생들의 심정은 착잡했다. 이같이 학교의 규모가 커지자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지부족이었다. 1919년께 까지 본교의 운동장에는 「테니스·코트」가 있었는데 경기중 공이 굴러가면 교문까지 뛰어가서 주어야할 정도였다. 이러한 실정이었으므로 어떻든 교지확충은 필수적인 사항이 되었다. 교지를 확충하려면 학교의 바로 북쪽에 있는 한말의 삼정대신 박제순의 저택을 입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저택은 화동에 있었던 전 경기고 운동장 한복판에서 성덕원(뒷동산)까지 걸쳐 있는 대저택으로 일찍이 한말의 척신 민영주가 살았던 곳인데 뒤에 윤치소·박영효(김옥균 등과 개화당조직·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를 거쳐 박제순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박제순은 합방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의 작위를 받은 친일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저택을 학교부지로 쓴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도리어 그 의 집앞에는 저택경비를 위한 순사가 주재해 있어 본교생들과 가끔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그러던중 l916년 박제순이 죽고나자 그의 대저택은 갑자기 폐허가 되었다. 1918년 2월19일「하세가와」총독이 본교에 왔을 때 그를 수행한 총독부 학무국장 「세끼야·뎨이사부로」(관옥정삼낭)가 박제순의 집을 가리키며 학교지가 좁으니 환지를 해주어 그 저택과 교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해 총독의 허가를 받았다.
본교에서는 이 늘어난 교지에 학생들이 직접 언덕을 깎아내려 운동장을 크게 넓히고 수공장(실업교육공장)등을 증축할 수 있었다. 그후 1934년 3월말에는 운동장이 더욱 확장되었으며 1938년 4월11일 본관이 낙성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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