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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같은 삶을 산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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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서양미술을 중심으로 미술의 역사를 써 놓은 서양미술사. 그 텃세 심한 정글 속에 우뚝 선 한국인이 있다. 백남준이다. TV가 드라마나 뉴스를 보는 편안한 기계쯤으로 많은 사람이 생각할 때 그는 TV 화면으로 미술작품을 만들었다. TV 속의 정보나 이야기가 삶의 일부가 되면서 사람들의 감성이 변했고, 그 변화된 감성에 맞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점에서였다. 그것이 무슨 예술이냐고? 화가가 물감을 사용하고 조각가가 돌이나 나무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감이나 돌 대신 영상을 사용했을 뿐 그 안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서 표현하는 것이다. 정지된 채로 가만히 있는 물감이나 돌보다는 수시로 번쩍이고 속도감 있게 변하는 영상을 사용하는 것이 더 신나고 담을 내용도 많았을 것이다.

 이른바 비디오 예술은 이렇게 탄생했다. 1960년대의 일이다.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컴퓨터까지 동원해서 별의별 효과를 다 만들어 낸다. 고정된 공간과 시간에만 머물던 작가들의 생각은 전파를 타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작가들이 다루는 매체만 달라졌을 뿐 종전의 미술작품들이 했던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30 년 전인 1984년의 일이다.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란 제목의 비디오 아트가 뉴욕·파리·베를린·서울에서 동시에 위성중계로 펼쳐진 적이 있었다. 미래에는 TV 같은 매스미디어가 인간을 지배할 거라는 오웰의 소설 『1984』의 암울한 예언을 향한 도전이었다. 인간 세상의 건재함을 알리고, 위성 기술과 영상매체를 타고 예술가 100명의 작품들이 만나 세계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하지만 TV 앞에서 열심히 봤던 초년생 미학도인 필자의 소감은 황당함 그 자체였다. 이상한 음악연주와 무용과 비디오 아트와 패션쇼와 코미디까지 뒤죽박죽으로 뒤섞어 놓은 영상 편집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어디까지를 미술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작품을 발표한 후 35년 만에 귀국한 백남준이 뱉은 말도 “예술은 사기다”였으니…. 참으로 난해한 미술이고 험난한 미학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은 정말 사기일까? 대가는 토를 달지 않는 법. 그는 이 말에 대해 더 이상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미술이론가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해서 심오한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대강 이렇다. 예술이란 실제 현실이 아니라 꾸며서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듦으로써다. 고흐 그림의 구불구불한 선들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지금은 고통과 격한 감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바람에 움직이는 칼더의 조각이 어린아이들의 장난감이 되고, 초현실주의의 낯선 이중 이미지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하나만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것은? 우리 주변에는 살아가면서 너무 익숙해져 잘 주목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당연한 것처럼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런 것들이 미술작품으로 등장할 때 우리는 의아해하고 낯설게 여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보고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예술은 그런 점을 이용한다. 결국엔 삶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다. 런던 거리를 항상 가득 메우는 안개를 휘슬러라는 화가가 그리기 전까지 런던 시민들에게 안개는 없었다고 한다. 휘슬러의 그림을 본 후 그저 불편하고 쓸데없는 것쯤으로만 생각한 안개가 거리의 낭만적인 분위기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찮게 여기는 콜라병이나 버려진 쓰레기들로 만든 작품이 대량 소비사회의 갖가지 단면을 생각하게 해 줄 수도 있듯이.

 예술이 이런 것이라면 예술 같은 삶을 살아 보려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주변에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 것, 익숙한 채로 남겨 두고 싶어 한 것은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새롭고 독창적인 삶의 태도가 예술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백남준은 고인이 되었기에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뜻이 이랬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작품을 보면서 가늠해볼 수밖에.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용인의 백남준 미술관에서 백남준과 관련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