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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오른 집년 18년 조치훈 「명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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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조치훈 8단이「오오따께」9단을 꺾고 일본 바둑계의 정상인 명인이 되었다. 조 명인은 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이국 땅에서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바둑에 정진해 세계 제1인자가 되었다. 이는 조 명인 개인 뿐 아니라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서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조 명인의 도일에서 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일본 기계속의 조 명인의 위치 전문가들이 보는 그의 기풍 등을 특집으로 엮는다.<편집자주>
18년만이었다. 1962년8월1일 삼촌 조남철씨의 손목을 잡고 바둑을 배우겠다며 깜깜한 밤 일본「하네다」공항에 내린 천진난만한 여섯 살 꼬마가 세계바둑의 정상인 명인「타이틀」을 차지한 24세의 헌헌 장부가 된 것이다.『이겼다.』
지난 8월22일「가또」(가등정부) 9판을 물리치고 제5기 명인전(「아사히」신문 주최) 도전자로 결정된 조치훈 8단은「지바껜」에 있는 부인「소가와·교오꼬」(30)에게 가슴 벅찬 승전보를 보냈다.
「명인만이 나의 목표」라며 이국 땅에서 갖은 어려움을 겪어 낸 그의 집념이 이제 꽃피게 된 것을 확신했던 것인가.
18년의 긴 세월이었다. 꼬마 치훈도, 청년 조치훈도 남 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고 극기해 온 세월이기도 했다.
조 8단이 바둑에 처음 눈뜬 것은 네 살 때였다. 형 조양연씨가 처음 가르쳤다. 치훈은 금방 기재를 드러냈고 천재소년으로 알려졌다. 일본「기따니」(목곡실) 9단이 제자로 삼겠다고 공식 초청했다.
일본에 건너간 치훈은 도착다음 날 임해봉 현9단(당시 본인방)과 5점을 놓고 두어 이겼다. 너무나 어려 방석을 명개 겹쳐 깔고 앉아야 했고 상대 앞에 돌을 놓을 때는 서서두어야 했다. 치훈은 이 바둑에 이겨 전 일본바둑「팬」의「마스코트」적인 존재가 됐다.
치훈은 동경 한국 학원에 다니며「기따니」도장에 나갔다.
10세에 입단하기로 계획을 짰다. 10세 때 입단 시합에 나가기 위해 원생끼리 예선을 벌여 떨어졌다.
『「닛꼬」(일광)에 있는 폭포에 빠져 죽으려고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조 명인은 그 매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분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또 울었다는 것.
68년2월 입단대회에서 12승4패로 일본기원 초단이 되었다. 최연소 입단기록이었다. 69,70, 71, 72, 73년까지 매년 승단해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6단이 됐다.
5단이 되었을 때 기자들이 소감을 물었다.
『나는5단이 되기 위해 일본에 오지 않았습니다.』15세 소년은 당당히 나의 목표는 명인이라고 말했다.
7단이 된 75년은 조치훈의 해였다. 55전39승16패로 일본기계 최다대국·최다 승리를 거두었다.
이해 5월l일은 감격스런 날이었다.
조치훈이 일본「프로」100걸 전에서 1위를 쟁취,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 바둑계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일본기원 5층 특별 대국질「유현」에는 주일 대사관·공보관 직원과 특파원들이 모여「샴페인」이 터졌다. 치훈은 울먹거릴 뿐.
그해 2월 치훈이 사상 최연소로 도전권을 획득, 일본 기원 선수권에 도전,「사까따」9단에게 분패한 후였기 때문에 이 승리는 더욱 값진 것이었다.
「타이틀」을 차지하자 치훈의 처신이 달라졌다. 모든 공식대국에서 상석을 차지하게 됐다. 일본 기원의 각종 면상에 붓글씨로 서명하고 기원 각종 행사에도 참석했다.
76년12월「왕좌」(일본 경제신문 주최)「타이틀」도 차지했다. 명실공히 일본 바둑계 강자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명인으로의 길밖에 남지 않았다.
조치훈은 77년11월 조용히 결혼했다. 부인은 6세 연상의「소가와·교오꼬」.「기따니」선생 집에 자주 놀러와 알게돼 3년간 교제했다.
『귀화는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조치훈은 자신이 한국인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76년5월 징병검사를 위해 일시 귀국했었다.
『신혼여행 겸 일시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77, 78년은 조치훈이「슬럼프」에 빠진 해였다. 각종 기전에서「타이틀」을 놓치고 부진했다.
2년 후인 79년8월, 그는 오랜 부조에서 벗어났다.
이번 명인전에서 맞붙은「오오따께」(대죽영웅)를 누르고 기성「타이틀」을 획득한 것이다.
『치훈의 바둑이 놀랄 만큼 강해졌다.』
「이시다」·「사까따」등 일본 기계의 강자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그는 곧 정상에 오를 것이다』라고-.
일본기계는 이 거함의 전진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조8단은 전진했다. 그리고 「명인전」의도전자가 되었다. 그리고 파죽의 4승1무1패로 명인이 되었다.
조8만이 이번에「명인」을 차지하게 된 데는 한가지 숨은 이야기가 있다.
장남의 출생이 그것이다. 조 명인은 명인전이 시작되기 6일 전인 지난 9월5일 첫아들을 낳았다.
일본 바둑계 정상을 노리는 대전을 앞둔 그에게 첫아들의 출생은 그를 용기 백배하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름은 조안마로 지었다.
만 두 살이 된 딸 조마도화와 함께 1남1녀를 두게 됐다.
조8단은 바둑의 정상인 명인이 되었다. 바둑은 산에 오르는 것과는 다르다.
정상 정복으로 끝나는 등산과는 달리 바둑은 정상을 차지하고 정상에 있어야 한다.
기라성같은 많은 기사들이 이 자리를 노리고 도전해 온다.
교만하지 않은 천재, 10세 꼬마로 이국 땅에서 몇 년만에 만난 어머니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했던 강인한 그는 이 자리를 지켜낼 것이다. 그리고 정상의 옆에는 또 높은 봉이 있다. 일본 최대 상금의 기성전. 조치훈은 기성전에서도 도전자를 결정하는 4강에 올라있는 것이다. <임재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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