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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불황의 상처가 부른 죽음|제일증권 중앙지점장 한명노씨의 자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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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증권계에서 당하는 괴로움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증권가격온 계속 하락세를 보인다. 고객도 갈수록 줄어든다. 이 책임을 지점장인 나 외에 누가 질 것인가. 증권계를 떠나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나는 죽기로 결심했다. 아내와 두 아들에게 미안하다….』
비통한 사연의 유서를 가슴에 품은 채 지난 9일 자신이 즐겨 찾던 서울 도봉산 정상부근 소나무가지에 목매어 숨진 제일증권 중앙지점장 한명노씨(44·서울 여의도동 대교「아파트」 1117호)의 자살사건은 한 개인의 죽음 이전에 우리 증권계가 앓고있는 깊은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휘문고·건국대 상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증권계에 투신, 20여년간 외곬인생을 살아온 한씨는 성품이 약간 소심하긴 하나 매사에 철저하고 성실해 이제까지 한번의 실수는 물론, 한번의 지각도 하지 않은 「의지의 사나이」로 알려져 왔다.
한씨가 제일증권에 몸담아 일해온 건 77년 1월부터.
한광증권에서 제일증권의 부장으로 「스카우트」 돼 월 70만원의 봉급과 연 4백%의 「보너스」를 받아 부장급 중에서도 호봉이 높았다.
명동지점장·본사 시장부장을 거쳐 지난해 11월 중앙지점장으로 부임한 뒤 한씨는 불황극복작전에 전신을 던졌다.
그 결과 지난 4월에는 2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약정고를 올렸고 지난 2·4분기에는 우수지점으로 표창까지 받았다.
그러나 9월 들어 영업실적이 형편없이 떨어지기 시작, 평월에 6억∼7억원 정도의 실적을 올리던 것이 지난달에는 4억원 밖에 못해 전국 5개 지점 중 3위로 떨어졌다.
이에 설상가상 격으로 주가가 오르리라는 전망으로 권유했던 주식이 계속 하락하자 손해를 본 고객들로부터 매일 밤 12시까지 항의전화가 빗발쳐 한씨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또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고객이 일정액의 40%에 해당하는 주식을 사면 1백%까지 융자를해줘 다시 주식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대용증권에서 한씨는 3천만∼4천만원의 손해를 입었다.
이렇게되자 자연 회사측에서는 한씨의 능력을 의심하게 됐고 한씨 자신도 자기의 위치가 흔들림을 직감했다.
10월 들어 한씨의 인사설이 파다하게 돌았고 한씨는 좌절하기 시작했다.
이사직을 버리면서까지 마지막 직장으로 선택했던 곳에서 도태된다는 패배감, 고객들과의 신용거래에서 손해본 것을 자신의 돈으로 메워야하는 경제적 타격, 밤낮으로 매일같이 걸려오는 고객들의 항의전화 등. 이러한 주변상황이 한씨를 자포자기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돈에 관한 한 구두쇠소리를 들어왔던 한씨는 지난 2일 아무 이유없이 현금 3만원을 직원들에게 내놓으며 『그 동안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회식이나 하라』며 하오 1시쯤 퇴근한 뒤 줄곧 출근하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다는 한씨 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직원들이 5일 아침 출근길에 문병을 가보니 전날 나가 아침에 들어왔다는 한씨가 옷에 흙이 군데군데 묻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
한씨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객들로부터 오는 전화 한 통화 한 통화가 내 목을 죄는 것 같다』며 전화 「코드」를 신경질적으로 잡아 뽑았다.
한씨가 그후 계속 출근하지 않자 본사에서는 6, 7일 양일간 지점감사를 실시했으나 한씨에 대해서는 아무 이상한 점이 없었다.
한씨는 이 소식을 전해듣고 8일 상오 7시쯤 가벼운 등산복을 입고 부인에게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나가 다음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부인 이복자씨(41)는 『평소 회사 일은 일체 말을 하지 않는 분이라 그저 속상한 일이 있구나 생각했다』며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가 있느냐』며 통곡했다.
한씨와 10여년간 줄곧 같이 근무해온 중앙지점 김영구 차장(36)은 『한지점장이 약간 소심한 면은 있지만 지난 60년 증권파동 때도 잘 견뎠던 분이 이렇게 쉽사리 무너져 내릴 줄은 몰랐다』며 『한지점장은 결국 우리 증권계의 불황이 죽였다』며 애석해 했다. <최승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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