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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937>|<제70화 야구에 살다>(36)-악몽의 6 2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내가 6· 25동난이 발발한 것을 안 것은 서울운동장에서였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대구상업과 동래중이 제5회 전국 중학선수권대회 결승전을 하고 있을 때였는뎨, 장내방송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다. 6·25밤은 회사에서 숙직을 하였고 인민군이 입경했을때도 결국 피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었다.
7월27일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젊은이들을 마구 징발, 서대문국민학교에 잡혀갔더니 3천여명의 젊은이들이 있었고 이중엔 동산고를 갓 졸업한 박지식도 와있었다.
인민군들이 잡아온 젊은이들로 부대편성을 하느라고 야단들 일때. 나는 다시는 못들아올 것같은 예감이들어 책임자를 만나 .치질이 심해 다음 기회에 오겠다고 엄살을 떨었다. 사실 나는 이 당시 약간 치질이 있는데다 운동하다 심한습진에 걸려있어 의사가 아닌사람은 속이기에 충분했다.
하늘이 도왔는지 책임자는 이를 순순히 받아들여 나는 겨우 빠질 수가 있었으며 박지식도 눈이 아주 나쁘다는 핑계를 대고 역시 빠져나왔다.
그러나 불과3일만인 7월30일 또다시 의용군으로 나오라는 통보가 와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효제국민학교로 끌려갔다. 나는 이번엔 도저히 피할수가 없을것같아 마지막수단으로 신체검사 불합격을 위해 효제국민학교로 가는도중 길에서 고춧가루 한봉지를 사서 참외를 씹으며 함께 먹어버렸다.
그러나 오장육부가 뒤틀리는듯 쓰리며 불과 3O분도 안돼 설사가 나기 시작해 집인 북아현동에서 효제국민학교까지 가는동안 여러차례 곤욕을 치렀다.
그때 나는 거리에서 식은과 금련에서 같이 야구를하다 공군에 임대한 허곤의 부인을 만났는데 나의 괴로와하는 모습을 보고 죽으러 가는 마지막 길이 안타까운듯 측은해했던 표정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이번엔 부대편성에 앞서 신체검사를 실시했는데 나를 본 군의관은 고춧가루 덕분인지 습진과 치질이 심해 안되겠다고 불합격 판정을 내려 두번째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불합격판정을 받고 나오다 포운에서 야구를하던 장석화를 만나 그런 얘기를 해주었으나 그는 결국 의용군에 끌려가 9·29수복때까지 고생을 겪다 겨우 살아남았다. 이때 나의 집근처에 살던 이영민은 지하실에 숨어있어 가끔 몰래 찾아가얘기를 나눴다. 이영민은 6·25가 터지기 이틀전 일본에서 귀국해 이 고생을하고 있었다. 조선야구협희(54년에 대한야구협회로 개칭)는 서상국 김동성에 이어 48년 의무부장관이던 임병직을 3대회장에추대, 활발히 움직이다 6·25를 만났다. 6월초순 야구협회는 김영석 이영민 오윤환등 3명을 일본에 파견, 「아시아」야구연맹 결성문제를 협의토록 했다. 그때만 해도 일본「비자」얻기가 어려운 터여서 성질이 급한 이영민은 외무부 유태하정보과장이 준 명함만을 들고 「비자」 도 없이 일본으로 띠났다가「하네다」 (구전)공항에서 입국을 못하고 애를 먹다가 주일대표부의 주선으로 겨우 입국하는 촌극을 벌였다.
김영석과 오윤환은 일주일후에 「비자」 가 나와 이형민과 합류, 일본측과 「아시아」 연맹결성에 원칙적 합의를 보았다.
「아시아」 연맹결성 합의를 마친 이영민은 6월23일 귀국했으나 김영석과 오윤환은 6월27일 비행기를 예약했다가 6·25가 일어나 결국 3개월동안 일본에서 본의아닌 망명생활을 하는 「에피소드」 를 남겼다.
감격의 9·28수복후 또다시1·4후퇴를 당하게되어 6·25때의 악몽을 잊을수 없는 나는 재빨리 소속회사인 금융조합연합회와 함께 부산으르 피난갔다.
부산피난시절은 암담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차차 안장을 되찾아 52년 여름부터 야구부를 다시 정비했다. 이해가을 금련 통운 남전등 3개「팀」만이 동래중 운동장에서 친선경기를 벌여 금련이 우승을 차지하기도했다.
그러나 피난시절 야구계의 가장 휙기적인 일은 군야구「팀」의 창단이다.
군「팀」의 창단으로 그동안 전혀 운동을 할 수 없었던 야구인들이 운동을 계속하게 됨으로써 휴전후 실업야구는 물론고교 「팀」들도 쉽게 부활할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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