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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개천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2차대전이 끝난 지 얼마 후에 불세출의 명 지휘자라는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필하모니」교향악단을 이끌고 「런던」에서 연주회를 가진 적이 있다.
「오케스트라」가 외국에 가서 연주할 때에는 그 나라의 국가를 먼저 연주하고 그 다음에 자기나라 국가를 부르는가 관례로 되어 있다. 물론 그 동안에는 청중은 모두 기립해서 들어야한다.
「푸르트벵글러」는 이 규례를 따라 영국국가를 연주했다. 청중은 일어서서 다 듣고는 착석하고 본「프로」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당시에는 연합군이 독일을 분할점령하고 있던 때였다. 그리고 패전국인 독일국가는 어디서나 금지곡목이었다.
영국의 청중은 특히나 「나치」부역자로 몰리던 「푸르트벵글러」가 다른 나라도 아닌 영국에서 독일국가를 연주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푸르트벵글러」가 지휘봉을 힘차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곡조는 뜻밖에도 몸서리치는 독일국가였다. 아연실색한 청중들은 서로 둘레를 두리 번 거리다 하나 둘씩 일어나서 의 숙연히 독일국가를 들었다.
전쟁에 지고 나라는 잃었지만 그래도 긍지를 잃지 않은 음악가들의 의연한 자세에 감동한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음악회에서의 「에티켓」을 지켜야겠다는 영국인의 예의 탓일까.
옛 적국의 수도에서 혹은 청중으로부터 받을지도 모를 욕설을 각오하고 감히 옛 국가를 연주한 독일음악가들의 조국애와 용기. 이를 또 그냥 받아들인 영국청중들의 너그러움. 모두 탐복스러운 일이었다. 나라가 있어 국가는 있다. 나라가 망해도 국가는 남는다. 국가를 부르는 사람이 있는 동안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 노래는 우리가 나라를 잃었을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 노래를 들을 때의 감동은 과연 언제 더 깊었을까.
오늘 아침부터 거기에서도 애국가가 들렸다. 개천절엔 국가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테이프」인지 「레코드」인지가 몇 백 번을 들은 탓인지 듣기가 거북할 정도로 곡조가 엉망이었다.
개천절이 단순한 공휴일 일수는 없다.
이 날이 왜 있는지도 모르고 산으로 가고 강으로 갈 수 있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날이다.
국가도 아무렇게나 놀려주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음악이다. 남이 달라니까 그저 게양하는 국기여서도 안될 것이다. 영문모르고 다는 국기, 아무 뜻 없이 부르는 국가라면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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