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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틀」을 벗고 변모하는 중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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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공이 다시 개벽을 하고 있다. 공산당 집권 30년간 집착해오던 이념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변혁의 문턱에 서있다. 서양문물의 영향이 어느덧 중공사회 구석구석에 파고들고 있다. 중공의 현대화 현장을 살펴본다. <홍콩=이수근 특파원>
북경의 「아이스·케이크」통
모택동이 군림하던 시절 중공 당국은 『우리 나라에는 도둑이 없고 파리·모기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그러나 중공사회에 도둑이 없고 강도가 없다는 주장은 당국의 철저한 통제와 대외은폐 탓이었음이 드러났다.
통제가 풀린 것은 이런 따위의 실상만은 아니다. 땋은 머리에 단조로운 회색제복으로 미의 본능을 거부하던 여인들이 서구 「스타일」의 「퍼머넌트」 머리에 「스커트」나 「원피스」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공원에 가면 젊은 남녀들이 손을 맞잡고 밀어를 속삭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게 됐다.
금지됐던 신혼여행도 다시 부활했다. 북경의 이화원이나 동정호 호반에는 연인들과 신혼여행길에 오른 젊은 부부들로 늘 북적이고 있다.
개인영업을 허가하자 도시의 거리에는 노점상들이 수도 없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잠깐동안 못질을 하면 만들 수 있음직한 네바퀴 달린 수레 위에 물건이나 도구를 얹은 이들 장사꾼들은 농촌으로 강제이주 당했다가 돌아온 청년들이나 퇴직한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구두·시계·자전거 등의 수리업과 과자·과일·간이음식 등이 노점상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금년 여름에는 한국에서 50, 60년대에 성업하던 「아이스·케이크」 행상들이 톡톡히 재미를 봤다.
광주의 동방「호텔」 부근은 「홍콩」의 「카세트·테이프」를 사려는 시민들로 언제나 장사진을 이룬다. 물론 암시장이다. 「홍콩」에서 겨우 5「달러」씩 하는 이들 「테이프」가 북경이나 심양에 가면 10배 이상씩이나 값이 뛰는데도 물건이 없어 팔지 못할 정도다.
모택동어록이 내팽개쳐지고 그 대신 나긋나긋한 연애소설에 기호가 몰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서포에는 인기작가 장양의 『두번째의 재회』 같은 애정소설과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외국번역 소설들이 나오기 무섭게 이른바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젊은이들의 의식의 변화는 그들의 결혼관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결혼상대의 첫째 조건은 완벽한 모택동 사상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젊은 남자에게 배우자 선택의 조건을 물으면 하나같이 「스타일」과 용모·인품·가정환경 등을 꼽는다.
중공국민들의 생활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실례들은 이밖에도 많다.
중공에서는 이같은 변화를 가리켜 『금구를 허물어버린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금구가 하나하나씩 무너져 나가다 보면 공산주의 자체의 존립의미마저 흔들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등의 딸과 농촌청년
중공의 현 노선은 지도자의 행동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중남해라면 중공의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이 살고 있는 북경의 주거지역이다. 종전에는 중남해로 들어가는 문은 일반서민에게는 완전히 금단의 문이었지만 지금은 개방돼 있다. 그보다 한층 놀라운 사태는 이 중남해에서 한달에 몇 차례씩 화국봉 등 요인들이 모여 전문가들로부터 과외수업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작년 8월에는 중공의 유명한 핵전문가 전삼강이 요인들을 모아놓고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상황과 전문가 양성의 필요성을 특강했다.
전문가를 우대하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위로부터 형성되고 있다. 교육에 대한 열의도 「높아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다. 금년에만 20만명 이상의 대학입학 재수생이 탄생했다. 당주석 화국봉의 아들도 재수생 신세를 거쳤다.
「신분」도 이젠 문제가 된다. 부주석 등소평은 자기 딸이 농촌청년과 혼인하겠다고 조르자 「신분에 맞지 않는 혼인」이라고 펄펄 뛰었다. 계층의 분화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중공에도 특권층의 존재가 대두되고 있다.
등의 부인 탁림은 딸이 농촌청년과 혼인하자 그들 부부를 천진으로 보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게 했다.
부주석 진모화는 작년 서구 방문길에 서독제 호화가구를 전용비행기에 가득 싣고 돌아와 큰 물의를 빚었다.
관리의 부패나 무능도 중공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당주석 화국봉은 수상으로서의 마지막 정무보고에서 관료주의의 병폐에 관해서 거의 절반을 할애했다. 외국 실업가들이 중공과 합자공장설치교섭이나 상담을 할 때 가장 곤란을 겪는 것이 관료들의 국제상 교섭에 대한 무지와 공공연히 바라는 뇌물문제라고 중공관리들과 교섭하던 한 서방 실업가가 토로했다.
이런 사실이 폭로될 수 있다는 것도 그만큼 사회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의미한다.
북경이나 상해에는 다시 사교 무도회가 문을 열고 상류층 인사의 어울림을 촉진시키고 있다. 특히 상해에는 민족자산가들이 과거의 재산을 일부 되돌려 받아 개인회사를 차리고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다.
상해 출신으로 구중국의 최대 민족자산가였던 영의인 (중국국제투자공사 총재)은 널찍한 저택에 2대의 승용차를 가지고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기있게 다시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상해의 영화롭던 시절의 사교장이었던 국제구락부를 다시 부활하여 외국인들과 「파티」를 열기도 한다.
「10억의 땅」에 이젠 제법 튼튼한 뿌리를 내린 실용주의와 현실화의 나무는 이제까지 금단으로만 여겨져 온 갖가지 「달콤한 풋과일」들을 조금씩 맛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새 풍조들이 지난 30년간 고집스럽게 지켜져 온 「이데올로기」적 순수성과 이에 따른 중공 특유의 사회구조를 얼마나 뒤흔들어 놓을지, 그 과정과 결과는 누구나의 관심사일 것이다.
방 한칸에 3대가 혼거
중국에선 보통 만혼을 한다. 여자들은 20대후반, 남자들은 30대초라야 대개 혼인을 할 수 있는데 이는 중공 당국의 인구정책 탓도 있지만 알고 보면 신방을 차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삼대동당은 중공의 어두운 생활상을 단적으로 증언한다. 서너평의 방 한칸에 3층 침대를 가설하여 할아버지·아버지·아들 3대가 혼숙하기 때문에 청춘남녀가 아무리 뜨거운 사랑을 한다해도 신방을 배정받지 못해 혼인이 늦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중공은 화교를 많이 배출한 광동성이나 복건성 등에 화교들을 위한 「프로젝트」라고 선전하며 화교자본을 끌어들여 대규모 주택을 짓고 있다.
화교가 분양받는 형식을 취해 실제로는 그들의 친척이 사용할 수 있게 한 교묘한 주택난 해결책이다.
지난 21일 밤 한국과 중공 전역에서는 한-중공 여자농구경기가 이례적으로 동시 중계됐다. 이 대회를 취재하러 북경에서 온 중앙인민방송의 한 기자는 『대략 2억의 국민이 시청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세트」가 대체 얼마나 있는데 그리도 많은 사람이 보느냐고 묻자 그는 『지금쯤 약 6백만대는 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인구 10억의 중공이 갖고 있는 TV대수가 인구 3천5백만의 한국의 TV보유대수와 맞먹는 셈이고 TV 1대당 20∼30여명이 농구경기를 지켜본 셈이다. 「스포츠」의 동시중계는 인민에게 오락을 제공한다는 중공의 새 사회정책에 따른 것이다.
국민의 생활수준이 기본적으로 빵문제는 겨우 해결했지만 그 이외에는 형편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여행자들 (화교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북경주보 (외국인을 위한 중공의 주간지)가 밝힌 바에 따르면 북경시민의 월 1인당 수입이 36.95원 (1만5천원)이다. 의·식, 기타 생활필수품 구입비가 소득의 91.3%를 차지한다.
물론 중공의 물가가 엄청나게 싼 것이 사실이어서 쉽게 서방세계와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득의 91.3%가 생필품에 쓰인다면 문제는 자명해진다.
최근 중공이 개인소득세법을 제정했다 해서 크게 주목을 받았지만 그렇게 떠들썩할 일은 못 된다. 소득세법은 월수입이 8백원 (4만8천원) 이상인 사람에 대해 과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공은 도대체 그만큼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연전에 부주석 등소평은 자신의 수입이 월 2백원이 안 된다고 실토했다. 그 법의 제정목적은 앞으로 진출할 외국인에게 과세하자는데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중공에는 「인플레이션」이란 것을 모른다고 공언해왔다. 그러나 금년엔 사정이 달라졌다. 중공은 공식적으로 6%내외를 잡고 있지만 「홍콩」의 경제학자들은 15∼20%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북경이나 천진 등 대도시에는 조직적으로 채소가격이 폭등하여 도시노동자를 울린다고 인민일보가 보도할 정도다.
그래서 광동성 주해시의 한 당서기는 자기 아들을 「홍콩」에 밀입국시켜 그들이 보내는 송금을 탐하다가 적발되어 10년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홍콩」과 접경한 광동성 불산현의 8백명이 다니던 한 중학교에서는 1년사이에 재학생이 2백명으로 줄었다.
부모들이 그들의 아들과 딸들을 「홍콩」에 빠져나가도록 권유했기 때문에 6백명이 중공을 탈출한 것이라고 「홍콩」의 명보지가 보도했다.
50「달러」만 송금을 받아도 대단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농민들이 기아에 못 이겨 자기의 아들이나 딸들을 팔아먹는 폐습은 옛 중국의 대표적인 악덕이었다. 그런 현상이 4∼5년전 사천성에 재현돼 등소평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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