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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현해탄 사이의 대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세네갈」의 시인대통령「상고르」는 아픔과 분노를 누르며 비통하게 부르짖었다.『우리의 희망을 빼앗고 우리목숨을 앗아간 그 하얀 손, 우리 모두를 짓밟고 우리를 노예로 만든 그 하얀 손, 우리의 아내를 빼앗고 우리 어린이를 고아로 만든 그 하얀 손 아,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결코 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망각의 늪 속에 원한과 굴욕에 사무친 불행한 과거를 던져버리려 애쓰면서도 그들을「용서할 수」없을 때가 많다. 보다 떳떳하고 충실된 삶을 위하여 앞을 향한 자세를 취하려는 우리에게 지금도 그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언행을 곧잘 취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읽은 일본의 유명학자들의 한국문제에 관한 좌담회에서 어느 유능하다는 젊은 학자의 발언을 보면 명치이래 일본인의「아시아」관은 일종의 도의주의의 변형이라는 면을 보아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긍정적 입장은 아니나 그래서 그들의 잔학한 무력침략은 「해외의 잘못」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하여 곤혹할 뿐이지 반성이라든가 뉘우침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잊지 못하면서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잊으려하는데 용서할 수 없게 하는 사람들, 과거의 격렬한 분노와 아픔을 자꾸만 상기하게 하는 사람들을 얼마큼 우리는 이웃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차라리 국익은 모든 도의에 선행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두려워는 하되 사무쳐 미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도의라는 거룩한 말을 자기합리화를 위하여 멋대로 쓰는 사람이 나는 밉다.
그러면서 나는 그곳에 살고있는 친구들의 정다운 마음과 글월들을 귀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미움과 사랑-분극화된 이 두 가지 각성은 내 내부에서 갈등을 일으키면서 어느 것도 자리를 비키지 앉으려 하는 것이다.

<작가·62세>

<6·25의 비극…딛고 성장|우리 세대에선 개선을>
이른바 전후세대로 불리는 내가 일본사람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란 우리나라「호텔」 「커피숍」에서 마치 제 세상인양 떠들고 있는 짧은 머리의 일본인들이 고작이었다. 자기네 나라에서 여행을 하는 것보다는 한국으로 오는 게 비용이 싸게 먹힌다고 하던가.
직접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그래서「호텔」안을 잠옷바람으로 활보할 만큼 일본인 관광객들의 수준은 낮다는 것이며 가지고 온「카메라」한대만 팔아도 여행비의 큰 몫이 빠진다는 얄팍한 계산 속을 대개가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일본인에 대한 사고가 우리세대로선 겪지도 못한 일제치하에의 선입감에서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네들의 경제력이 우리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부르는 6·25를 바탕으로 급속히 신장되어 결국 세계 제2의「부자나라」가 되었다 는걸 생각하면 『우리는 정경분란이기 때문에 북한과도 상거래를 할 수가 있다』는 저네들의 얄미운 논리는 너무나 속이 들여다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사는 역사고, 현실은 역시 현실이다. 그러니 미워하는 감정은 그대로 남겨두더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한국영화의 낙후성 때문에 일본영화가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좋은 영화를, 「텔레비전」을, 전자계산기를 만들어야한다.
대 공사 국 최전방에서 애쓰고 있는 한국의 안보가 저들 말대로 『일본의 안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면 우리에게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지는 못할 망정 적어도 새로운 이득에서 한국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그것은 우리들 전후세대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리더」의 역할을 하게 될 대 가능하리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져본다.

<작가·33세>

<반일 감정 의외로 깊어 주관적 사관은 고쳐야>
『내 고향은 한국인지도 몰라…』한국을 여행할 때마다 나는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한다.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말을 몰라도 큰 불편이 없다. 나이가 든 사람과는 일본말이 통하고 통하지 않을 때는 필 담이라는 무기가 있다.
호주머니 속에 있는 「메모」를 보여주면 금방 길을 알 수 있고 마늘·고춧가루만 먹지 않으면 음식도 일본과 다를 게 없어 동문동칭 이라는 실감이 뼈 속까지 스며든다.
한가지 한국에서는 아직도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구나 하는 감을 느낀다.
「도요또미·히데요시」 (풍신수길)의 한국침략에 대해 한국에서는 이를「임진왜란」이라고 부르고 일본수군을 쳐부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주요 관광지에는 반드시 서있다.
명치 이래의 총독부 시대라는 긴 통치기간 동안 받은 상처는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깊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것이 어떤 면에서는 일본인에 대한「콤플렉스」인 것 같기도 하며 무리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그 무서운 집념에 놀라기도 했다.
한국인의 역사관에도 오류가 있는 것 같다. 내가 본 이모교수의 『한국사 신론』은 「일본의 왜곡된 한국사관」만 공격, 왜가 삼한·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진출한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역사란 그것이 가령 침략 받은 굴욕의 역사라도 역사인 한 피해 나간다고 통하지는 않는다.
고대의 왜의 진출을 무시하고 편견을 갖고있는 것을 보고 일말의 슬픔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이 역사책을 쓸 때도 거기에는 역시 민족 관이 삽입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실감한 일도 있다.

<평론가·61세>

<고향의 산 같은 인왕산|판소리 듣고 깊은 감동>
내가 한국을 여행해 본 것은 꼭 한번이었지만 한국의 민요와 판소리는 피를 끓게 하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며 생기를 돋운다.
특히 김소희씨의 『심청가』는 일품이어서 지금도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가끔 듣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현대적인 것이 아닌 각별히 손때가 묻지 않은 옛 그대로의 민요다.
그래서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나는 솔직히 말해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그 충격은 내 핏속에 남아 문학을 자극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직 한국에는 자연 그대로의 것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땅에서 생겨나 한국 땅에서 발전해온 한국의 판소리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거기에는 서양풍의 이념이나 이론과는 다론 한국의 희로애락이 있고 일본의 그것도 있었다.
민속학자인 임모씨에 이끌려 서울의 인왕산을 둘러본 일이 있다.
인왕산은 산 전체가 바로 성산 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푸른 하늘 아래 우뚝 서있는 인왕산의 기암은 지금생각하면 내 고향「기슈」(기주)의 압개산의 바위와 매우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부모는 물론 다른 누구로부터도 내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들어본 일은 없다.
그럼에도 아주 먼 옛날 그 기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 드린 일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기지감 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한국에 있을 때는 끊임없어 나를 자극했다.
다시 한번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

<개천상 수상작가·3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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