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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기·적응력 없다” vs “일의 재미·미래 없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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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호 08면

샘표식품의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 포함돼 있는 ‘요리 면접’ 장면(왼쪽). 4~5명이 팀을 이뤄 요리를 만드는 과제를 수행한다. 음식의 맛보다는 지원자들의 동료에 대한 배려 등 인성을 주로 평가한다. 아웃도어 의류 제조사인 블랙야크의 ‘등산 면접’ 장면(위쪽). 회사 측은 입사 지원자들의 인내심과 협동심 등 품성을 주로 살펴본다. [중앙포토]

대기업 L사의 인사 부서에서 일하던 대졸 신입사원 C씨(26)는 지난 2월 회사의 직급·직무 변화를 분석하는 일을 맡았다. 과거의 직급 기준 때문에 애로가 생기자 부서 내 8년 선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그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되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잘 모르는 눈치였다. 며칠 뒤 자신의 대학 졸업식 때문에 어머니가 상경하는 날 마침 부서 회식이 잡혔다. 한 상사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퇴근 후에 마중을 가려 했더니 묘한 뉘앙스를 담아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이 회사 계속 다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지난 6월에 퇴사한 그는 지금 언론사 취업을 준비 중이다. C씨는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버리고 백수가 되는 길을 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들에게서 보여지는 미래의 내 모습이 끔찍스러웠다”고 말했다.

입사 초년생 퇴사율 25% 시대의 엇갈린 이유

 대형 연예기획사에 다니던 K씨(28)는 올해 초 사표를 냈다. 즐겁고 활동적인 직장 생활을 기대하며 지원했고 주변의 부러움을 사며 합격한 회사였다. 새롭고 창의적인 일에 대한 기대가 컸다. 하지만 1년 동안 주로 한 일은 컴퓨터로 서류를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사무실의 온갖 잡일도 그의 차지였다. 창의성보다 체력과 지구력에 의존해 일을 하는 것은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K씨는 지금 통번역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입사 초년생들이 회사를 떠난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지난 6월 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405개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1년 내에 퇴사한 비율은 25.2%로 나타났다. 경총의 2010년 조사에서 이 수치는 15.7%였다. 4년 새 9.5%포인트가 상승했다. ‘취업대란’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등의 표현이 난무하는 시대에 애써 들어간 회사를 1년도 안 돼 제 발로 나오는 젊은이가 네 명 중 한 명이다.

“선배들 보니 앞날 끔찍” 서둘러 사표
도대체 이유가 뭘까. 경총은 조직·직무 적응 실패(47.6%), 급여와 복리후생에 대한 불만(25.2%), 근무 지역·환경에 대한 불만(17.3%) 등으로 원인을 설명했다. 회사들을 통해 퇴직 사유를 집계하고 분류한 결과다. 기업은 젊은이들을 탓한다. “다들 귀하게 자라서인지 끈기가 없다.”(제과업체 C사의 채용 담당 직원), “스펙만 화려했지 조직 생활에 대한 준비는 안 돼 있다.”(대기업 D사 인사담당 임원) 삼성경제연구소는 한 보고서에서 조기 퇴직 신입사원들의 문제를 파랑새 증후군(막연한 기대감으로 직장을 계속 탐색), 셀프홀릭 증후군(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대 평가), 피터팬 증후군(책임감 회피)으로 분석했다.

 하지만 조기 퇴사 당사자들의 얘기는 다르다. 중앙SUNDAY가 입사 1년 내 퇴사자 30명을 만나 인터뷰한 결과 ‘업무에 대한 불만’이 가장 큰 빈도(11명)를 차지하는 ‘퇴사의 결정적 이유’였다. “맡은 일에서 흥미나 의미를 찾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 다음으로 자주 언급된 사유는 ‘회사 또는 나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였다(9명). 자신들이 적응을 못한 것이 아니라 맡겨진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회사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주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과연 어느 쪽 얘기가 더 사실에 가까울까. 진로 컨설팅 전문가인 김세준(45·『슈퍼 신입사원』의 저자) 국민대 경력개발센터 겸임교수는 “양쪽 모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 어렵다. 기업은 이미지 손상을 꺼려 정확한 실상을 공개하지 않고 있고 퇴사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행위를 합리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진실은 그 중간쯤에 있다”고 말했다.

 신입사원 조기 이직 현상은 시대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는 해석도 있다. ‘4분의 1의 삶의 위기(Quarterlife Crisis)’라는 논문을 쓴 올리버 로빈슨 영국 그리니치대 교수는 e메일 인터뷰에서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초혼 연령이 30세 전후로 늦춰지면서 인생과 진로에 대한 젊은이들의 탐색 기간이 길어졌다. 이때 겪는 실직이나 이별은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본지 인터뷰에 응한 30명의 퇴사자는 대부분 회사 근무 경험이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1년 내 퇴사 땐 기업 손해 6000만원
대기업들은 입사 1년 만에 퇴직하는 직원은 6000만원가량의 손해를 안긴다고 추산한다. 1인분의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가운데 받은 급여, 교육비 등이 포함된 금액이다. 신입사원들이 우수수 떠나면 직원들의 사기도 떨어진다. 이 같은 손실을 막기 위해 기업도 안간힘을 쓴다. 채용 때 사회성과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합숙 면접, 등산 면접 등이 동원된다. 한 대기업은 ‘불평·불만 유발자’를 사전에 걸러 내기 위해 면접 합숙 때 인사팀 직원을 지원자로 위장시켜 ‘스파이’로 투입한다는 소문도 있다.

 신입사원들의 소속감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도 시도되고 있다. 단체 공연·스포츠 관람, 운동회·야유회, 최고경영자(CEO)와의 식사, 신입사원 부모에게 보내는 CEO의 편지 등이다.

“신입사원의 합리적 동의 받아내야”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대기업 C사에서 퇴사한 P씨(26)는 “운동회나 MT(멤버십 트레이닝)는 집단 문화를 강요하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직무와 연관된 교육을 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공기업에 다니다 사표를 낸 K씨(25·여)는 “해병대 캠프에도 다녀왔다. 말로는 창의력을 존중한다면서 실제로는 조직 순응을 요구하는 이중성에 실망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소속감·충성심 고취 프로그램보다는 회사와 직원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 비전 제시나 전문성 개발 교육이 조기 퇴사를 줄이는 데 효과적이라고 조언한다. 구인·구직 컨설턴트 장현아씨는 “퇴사 문제를 걱정하면서도 막상 신입 직원들에 대한 사후 관리를 제대로 하는 회사는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세준 교수는 “신입사원들에게 영업이나 고객 응대 등의 험한 일을 시킬 때 그 일이 회사의 경영을 이해하고 경력을 쌓는 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 충분히 설명해주면서 합리적 동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언 기자, 차길호·황은하 인턴기자 joon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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