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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 터지자 수출중심 성장과 과다 흑자가 최대 약점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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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호 18면

자료: 블룸버그·한국은행

지난달 31일 도쿄 긴자의 미쓰코시 백화점. 평일인데도 쇼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의류 매장의 한 직원은 ‘소비세 인상 안내’ 팻말을 가리키며 “걱정을 많이 했는데 (소비세 인상 이후에) 오히려 매출이 는 것 같다”고 말했다. 때마침 중국 관광객들이 단체로 몰려들었다. 고가의 셔츠와 바지를 열 벌도 넘게 사갔다. 매장 직원의 표정은 밝았다. 신주쿠의 호텔에선 밀려드는 투숙객 덕에 체크인이 길어졌다. 롯폰기 힐즈의 레스토랑도 “빈 자리가 없다”며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사과하기 바빴다.

현지에서 들어 본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넥타이 부대 행렬을 따라 도쿄 중심부 오테마치에 있는 니혼게이자이신문 본사로 갔다. 후카오 교지(深尾京司·58) 국립 히토쓰바시(一橋)대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그를 보자마자 “일본 경제가 살아나는 것 같다”고 물었다. “아직 속단하긴 이르다. 일본의 시골에 가서 하릴없이 앉아 있는 노인들을 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아베노믹스가 성과를 보이고는 있지만 제3의 화살인 경제 구조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면 위기는 계속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후카오 교수는 2012년 『잃어버린 20년과 일본경제』란 책을 펴냈다. 1990~2010년에 이르는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는 부적절한 재정·금융정책이 한 몫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만성적인 내수 부진과 생산성 저하 등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그동안 90년대 초반 일본의 버블 경제 붕괴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많았지만 후카오 교수처럼 ‘잃어버린 20년’ 전체를 대상으로 구조적 원인을 분석한 연구는 드물다.

1985년 플라자 합의 후 버블 생겨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인사청문회 때부터 줄곧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언급했다. 최 부총리는 “한국 경제에 저성장, 저물가, 과도한 경상수지 흑자라는 불균형이 존재하는데 이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당시 나타난 모습”이라고 말했다. 과연 지난 20년간 일본경제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후카오 교수의 말대로 일본의 장기 침체는 85년 플라자 합의(Plaza Accord)가 시발점이었다. 무역적자에 허덕이던 미국이 일본·독일·영국·프랑스의 재무장관을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모아놓고 엔화와 마르크화의 가치 상승을 유도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85년 달러당 238.6엔이던 환율이 89년 128.1엔이 됐다. 3년 만에 46.3%나 엔화 가치가 절상됐다. 일본의 경제 성장률도 85년 6.3%에서 이듬해 2.8%로 급락했다. 엔고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은행은 공격적인 저금리 정책을 폈다. 은행들이 대출경쟁에 돌입하면서 자산 거품이 형성됐다. 때마침 일본 정부가 수도(首都) 기능분산 등 국토 균형발전을 추진하면서 부동산 거품이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자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92년 정반대의 정책에 돌입했다. 대출규제와 금리인상을 단행한 것이다. 잘못된 진단과 처방으로 이번에는 주가가 폭락하고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면서 장기침체가 시작됐다. 경제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자 재정지출을 확대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경제 구조를 개혁하는데 나랏돈을 쓰지 않았다. 대신 사회보장과 공공일자리 창출 같은 혜택을 나눠 먹은 분야에 돈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일본의 국가채무는 GDP 대비 250%를 넘을 정도로 악화됐다.

미국 연방준비이사회(Fed)는 2002년 ‘1990년대 일본의 경험에서 배울 점’이란 보고서를 통해 당시 일본의 통화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일본은행이 90년대 초반 유연한 통화정책을 편 게 당시로선 당연하다고 생각됐지만 투자가 줄고 저물가가 지속한 걸 보면 그때 진단과 처방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여기까지가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에 관한 종래의 전통적 연구다. 부적절한 재정·통화정책이나 디플레이션을 중심으로 진행돼 왔다. 하지만 후카오 교수는 2000년대 들어 부실채권이나 대차대조표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이후에도 경제성장률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했다. 재정·통화정책만으로 장기침체를 100%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20년’의 진짜 원인은 90년대부터 진행돼 온 생산 가능인구의 감소와 생산성의 하락 같은 구조적인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고 분석한다.

규제완화로 기업 투자 유도해야
일본의 생산 가능인구는 95년부터 줄기 시작했다. 노인 1명을 생산 가능인구 3명이 부양해야 하는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됐다. 나라가 늙어가자 생산성이 떨어지고 소비도 침체됐다. 일본의 총요소생산성은 85~90년에 3.3%에 달했으나, 90년 이후 급속히 감소해 0.7%에 그치고 있다. 소비침체는 수입감소로 이어져 경상수지 흑자 폭만 커지는 불황형·불균형 경제구조가 고착화했다.

하야시 후미오(林 文夫) 히토쓰바시대 교수와 에드워드 프레스콧 카네기멜런대 교수도 후카오 교수와 비슷한 의견이다. 이들은 일본의 낮은 총생산성(aggregate productivity) 증가율에서 ‘잃어버린 20년’의 원인을 찾았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일본의 은행과 기업들의 모럴 해저드가 버블 경제를 가속화했다고 분석했다. 은행과 기업은 어떻게 되더라도 세금으로 구제받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인식이 팽배했다. 크루그먼은 “일본의 은행들은 대출받는 사람의 능력을 보지 않고 대출을 늘렸고, 버블경제를 가중시켰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경험은 옆 나라 한국에도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 내수부진과 수출 주도 성장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까. 한국경제연구원은 정책연구 보고서에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선 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을 높여 내수활성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를 대체할 정책 마련도 지적됐다. 노동의 유연성과 안정성을 추구하고 여성·외국인 노동력을 확충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후카오 교수도 비슷한 대안을 제시했다. “‘잃어버린 20년’에 빠지기 전 일본은 수출주도형 성장, 많은 흑자, 고용 안정성 등으로 전세계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버블이 붕괴하자 바로 그 강점들이 최대 약점이 됐다. 한국경제는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지금으로선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언제 그런 강점이 약점이 될지 모를 일이다. 실질적인 중소기업 육성 등으로 대비해야 한다.”

도쿄=박성우 기자 bla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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