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한국은행-군표사건(3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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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경지점이야기를 마무리지으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당시 세간의 큰 물의를 빚었던「군표사건」 의 전말이다.
사실내용이야 여하간에 일본과 부산할것 없이 신문보도로떠들썩했고 그 뒤끝이 개운치않았던 터라 이번 기회에 기억을 되살려 그때 일을 정리해두고자 한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주요업무중의 하나가 일본에서 찍은 한국은행권을 부산본점에 현송하는 일이었다.
규정에 따라 부산까지 가는 배편에 꼭 은행직원1명을 동승시켜야 했고 가장 자주 이일을 담당했던 직원이 지금은 고인이된 최병우군이었다 (최군은 현지채용한 우수한 청년으로 군표사건을 계기로 한국은행을 떠났고 장기영씨와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한국일보의 외신부장, 「코리아·타임즈」 의 편집국장까지 지냈으나 대만금문도전쟁을 취재하다가 순직했다). 최군이 현송을 끝내고 돌아와야할 날 엉뚱하게 일본세관에붙잡혀있다는 전화연락이 왔다. 통화내용인즉 본점의 명령에따라 비공식으로 군표 2만4천 「달러」를 가져오다 세관에서 발각되어 붙잡혀 있으니지점에서 해명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본점에서 군표에 관한 아무런 사전연락을 받은 일이 없었던 터라 무슨 영문인지를 알수 없었다.
어쨌든 최군은 곧 풀려나왔고 군표문제도 미군정의 협조로 무난히 수습되었다.
그리나 이 일이 지상에 보도되자 국내에서는 이승만대통령까지 대노해 직접 진상규명에나서겠다고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제가 이대통령자신이 그토록 챙기고 있는 외화에 관한 것이요, 또 정부기관이 마치 밀륜나 한것처림 알려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동경지점에서도 현송하러갔던 최군이 개인적인 청탁에 의해 저지른 일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본점고 연락해본 결과 최순주재무장관과 장기영부총재사이에 사전양해아래에 행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동경지점의 입장에서는 개점초기라 늘 자금이 부족한 상태였고 당시 일본에는 미군표가 공공연히 통용되고 있었다.
동란중에 국내 생산은 마비되었고 문방구·십기등속 조차 구하기 힘든 상태였으니 외화송금하는 것도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정식 외화송금을 하자면 까다로운 이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아야하는 번거로움을 피해 현송을 맡았던 최군의 귀로를 이용해 비공식적으로 군표를 보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세론은 호의로만 봐주지 않는것 같았다. 일부에서는 필경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통한 것이리라는 억측도 나돌았었다.
급기야 이대릉령의 노기가 터졌다. 동경지점 책임자를 즉시경무대로 들여보내라는 전갈이주일대표부로 부더 날아왔다.
동경지점으로서는 엉뚱하게 당하는 일이라 싶어 본점에 전화를 걸어 귀국여부를 물었다.올것까지 있겠느냐며 본점에서알아서 수습하겠다는 응답이었다.
그러나 며칠후 다시 대표부의독촉을 받고 결국 일의 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는 간병규지점장을 부산으로 보냈다.
이대통령을 직접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던 간씨의 딸을빌면-.
『그무슨 사건 였잖아. 미군돈말이야』『군표사건말입니까. 』『그래. 너희들 일본에 있는놈을과 짜고 한것이지. 바른말 안하면 사직에 말해서 잡아넣겠다.』
1시간이 넘도록 천씨가 땀을 홀리며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는동안 이대통령은 줄곧선채로 눈믈부라렸다고 한다.
정 급할때는대롱령의 옷소매까지 붙잡았다는게 간씨의고백이다.
『알았어,죄가없는 것같다 .빨리 들아가서일이나잘해-.』이렇게 해서군표사건은 수습 되었다.
52년4월, 만2년 1개월의동경 지점생활을 마치고 본점으로 돌아 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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