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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의 세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복싱」만큼 정직한「스포츠」는 없는 것 같다. 「복서」의 투지·단련·극기는 「링」위에 너무도 숨김없어 나타난다. 요령도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이 승패까지를 가늠하는 척도는 되지 못한다.
결국 근엄한 자기 연마와 피나는 노력에서 보다 앞선 쪽이 승자가 되기 마련이다.
「복싱」의 극치는 따라서「다운」이나「스트레이트·편치」에 있지는 않다. 그 보다는 최선을 다 하는, 그 장렬한 투지에 있다. 그런「복서」가 비록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관중들은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승패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금년 봄 김태식과 「파나마」의「루이스·이바라」와의 대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도전자인 김 선수의 기량과 역량을 의심했다.
그러나「링」위에 오른 김태식은 의외였다. 그는 초전부터 최선을 다했다.
상대선수가 호흡을 가눌 여지도 없이 저돌(염돌)했다.
물론 그 나름의 작전이었겠지만, 문제는 투지다. 또 그런 투지를 뒷받침해 줄 노력과 단련의 축적이 있었을 것이다. 2회전에서 그는「챔피언」이 되었다. 최선이 가져온 최선의 결과였다.
어제 동경에서 벌어졌던 김성준과 일본 「오오꾸마」(대웅정이)와의 대결도 그만하면 최선을 다했다.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김 선수는 뒷걸음치지도 ,요령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바로 이런 경우에 관중들도 승패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스포츠」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지만 선수의 경우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기를 유감없이 불태운다는 것은「스포츠」인으로는 그 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다. 그에겐 새로운 가능성이 남아 있으며, 그런 신화가 살아 있는 한 승리도 기대할 수 있다.
세계「복싱」의 정상에 군림한「알리」도 언젠가는 「링」위에서 뒷걸음만 친일이 있었다. 그는 상대를 더 많이 공격하기보다는 덜 맞는 전법을 생각했던 것 같다. 무승부로 결국 그의「벨트」는 지켰지만, 이 경우는 감동도, 열기도 없었다. 어떻게 이기느냐가 문체가 아니라 어떻게 싸우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복싱」의 세계는 흡사 우리 삶의 한 구도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평범한 진리지만 최선을 다하는 일은 언제나 아름답다. 인간에겐 투지와 극기와 자기수련이라는 미덕이 있다. 그런 미덕을
덮어두고 사람들은 기회나 요령에만 집착하는 경우를 때때로 본다. 진정 이런 사람들은 성취의 참 기쁨 같은 「휴먼·드라마」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복싱」은 우악스러운「스포츠」지만, 2천6백 여년을 두고 계속되며 때로는 감동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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