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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시인이 자연을 노래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언제나 자연과 밀착되어 진행된다는 일종의 고정관념 때문이다. 고정관념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은 도대체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명료한 비판의 계기도 없이, 많은 시인들이 자연을 미리 주어진 것으로 수용함을 의미한다. 자연을 미리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임은 지나치게 소박한 인식론적 태도다. 자연은 소박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자각, 나아가 그것은 인간의 명증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어떤 분명한「메시지」도 주지 않는다는 자각을 우리는 이상이나 김춘수의 시편에서 읽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최근 이 땅 시단에서 우리는 이러한 인식론적 태도에 대한 일종의 반동을 본다. 다시 소박하게 자연을 노래하려는 시인들의 몸짓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박용래는 이제까지 사라져 가는 자연을 매우 간절한「이미지」로 노래한 시인이다. 사라져 가는 자연이란 싸락눈 가랑비 강아지풀 해으름 따위의「이미지」가 환기했다. 이 달에 발표한『앵두, 살구꽃 피면』(현대문학 8) 역시 앵두꽃이나 살구꽃 같은 토속적인 자연을 노래한다. 오늘의 삶에서 사라져 가는 자연이다. 그의 자연은 언제나 인간으로서의 무력감을 동반한다.
그의 자연은 미래 지향적이 아니라 과거 지향적인 연상을 거느린다.
일종의 낭만주의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과거와의 교통 속에서 이룩하려는 소박한 태도다.
이유경의 신작 5편 (심상 7) 역시 자연을「모티프」로 한다. 특히『예당의 비』는 예당이라는 한 마을에 내리는 비를 노래한다.「소용없는 비」라는 그의 참담한 고백은 자연에 기대려는 인간의 몸짓과, 그러한 몸짓의 허망을 동시에 알려준다. 그는 자연과의 친화를 노리지만 언제나 그로부터 배반당한다.
일상의 세계와 자연의 세계사이에서 싱싱한「아날로지」를 발견할 수 없게된다. 그의 자연은 과거의 온기도 미래의 꿈도 상실한 무의미한 실체로 노출된다. 그것은 기막힌 자탄의 형식일 뿐이다.
박제천이『용가』(한국문학 8)에서 노래하는 것은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연이다. 물론 연은 자연물이 아니라 인공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공의 거친 흔적들을 말끔히 초월한 유사자연물이다. 하늘에 떠 있는 연은 하나의 자연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인공이다. 자연과 인공의 한계를 벗어나는 세계, 거기서 우리가 읽는 것은 예술의 가장 빛나는 논리다. 그것은 사물의 양면성을 순간적으로 포착한다.
자연과 인공의 대립이 아니라 그 종합을 하나의 연 속에서 읽는 그의 눈은 아름답다. 그의 자연-인공의 변증법은 자연을 소박하게 노래하는 것과 인공의 세계만을 생경하게 노래하는 것을 동시에 극복한다. 그것은 꿈의 논리가 성취한다.
제4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신인 김명수의 시집『월식』(민음사)을 읽었다. 월식이라는 자연현상은 상징으로 다가온다. 삶의 밝은 부분이 가려졌다는 그의 의식은 따라서 삶의 밝은 부분을 열어 보이겠다는 의지를 밑에 깔고있다.
언어를 간결하게 쓸 수 있는 힘은 높이 살만하다. 그러나 시가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의 상상력의 정태성을 엿보게 한다. 그의 자연은 박용래처럼 과거의 연상을 거느린다. 따뜻한 기억들이기보다는 쓸쓸한 기억들이지만, 그 쓸쓸함이 <무죄의 층계>에 공존한다는 자각은 충분히 새로운 목소리일 수 있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일종의 허위의식에 젖어 일상의 차원에서 맴돌 때 이렇게 얌전하지만 단단한 자기세계를 노래할 수 있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한양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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