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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시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서민생활침해사법·불량공산품·소비자고발 등 갖가지 신고·고발창구가 늘어나면서 시민생활의 불편이나 억울함을 들어주는 민원창구의 문턱이 크게 낮아졌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발길이 잦아지는 한편에서 사소한 시비나 억지, 심지어 남을 모함하기 위한 무고행위까지도 많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있다. 더우기 이웃이나 동료간의 하찮은 다용까지도 양보나 화해로 해결하기에 앞서 신고나 고발 등으로 판가름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있다. 이 때문에 가뜩이나 바쁜 관계자들의 일손이 더욱 달리는가하면 시민들의 편의를 도모하려는 제도가 자칫하면 이웃간의 불신을 초장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고소·고발·친절을 받는 곳은 서울시내에만도 각 경찰서의 「112신고」「서민생활침해사범신고」 「새 생활센터」「노인보호상담실」, 수사계의 각종 「진정·고소·고발담당」 등을 비롯, 각 구청의 「민원신고」「불량 공산품」「유해·불량식품」, 기타 공공단체의 「소비자보호」「소비자고발」 등 곳곳에 널려 있다. 이외에도 보다 영향력있는 창구로 검찰의 「구두고소·고발」과 「청와대민원실」 등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쉽게 찾아가고 이용할 수 있어 그만큼 문턱이 낮다.
소비자고발「센터」의 경우 올 들어 모두 1백10건이 접수됐으나 억지전화고발이 상당수로 이 같은 고발을 합친다면 무려 3천 여건도 넘는다. 한 관계자는 집에 사다 놓은 지 10일도 넘는 우유가 『변질됐다』. 또는 『가구를 들여놓는 과정에서 흠이 났으니 부실품이다』등의 억지고발도 하루2∼3건은 된다고 했다.
서울 양진경찰서의 경우 올 들어 6월말 현재 고소접수건수는 6백7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5백89건보다 15%쯤 늘었으나 구속사건은 겨우 42건(6.2%) 뿐이며 거의가 경미한 사항들이다.
양진경찰서에 접수된 「112폭행신고」는 지난 4월이래 모두 30건이나 이중17건이 훈방조치 돼 절반 이상이 순간적인 흥분을 못 이겨 전화 「다이얼」을 돌린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달 20일 하오2시쯤 서대문구 청장실에 설치된 민원신고「센터」를 찾아간 홍모씨(30·서울북아현동)의 경♀ 강북지역엔 허가금지사항으로 된 유흥업소 개업허가를 내달라며 2시간동안 억지를 부리다가 뜻을 못 이루자 『시청과 국보위민원실에 찾아가 구청의 비위를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
지난5월5일 밤12시쯤 서울흑석2동 김모씨(51)집에 세 들어 사는 조보씨(45)는 세 살 아래 동생과 말다툼하다 동생이 밀치는 바람에 넘어져 어깨에 작은 상처를 입자 「112」로 동생을 신고했다. 우선 처리해야하는 「112」사건이라 급히 달려간 경찰조차 맥이 빠져 버렸다.
신고접수대장에 기재돼 문서처리를 해야하기 때문에 경찰서까지 연행은 했지만 태산 같이 많은 일을 놓고 시간만 낭비했다고 담당경찰관은 투덜거렸다.
이밖에도 「며느리가 심하게 군다」「어머니가 몹시 때린다」「쓰레기를 옆집대문 앞으로 버린다」「친구가 술에 취해 때렸다」「집안으로 자꾸 배구공이 들어와 짜증을 냈더니 때렸다」 등등 가정안 문제, 이웃간·친구간 등의 사소한 시비로 싸움을 벌이다 양보·화해를 하지 못하고 경찰서로 달려오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서울대의대 조두영교수(정신과 전문의) 는 『이제까지 수 백년 동안 유교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 국민들은 남에게 직선적인 공격을 하는 것을 금물로 여겨오다 정부 당국에서 고발「센터」둥을 설치함에 따라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몰린 것』이라며 『이 같은 현상이 너무 심하면 국민간의 불신을 조장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서로 대화와 토론으로 해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허남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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