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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권 발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한국은행권 긴급제조 명령을 받은 김진형동경주재부총재는 즉시 주일대표부로 김용주공사를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한국은행권을 하루속히 본국으로 보내기 위하여 주일대표부와 한국은행 동경지점의 간부들을 총동원, SCAP를 비롯하여 일본대장성·일본은행등 관계기관의 협조를 요칭하고 구체적인 절차를 협의했다. SCAP에 이의가 있을리 없었다. 일본의 당로자들도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처음으로 발행되는 한국은행권이라는데 있었다. 지폐의 「디자인」부터 시작해야했던 것이다. 한국은행은 10여일전, 6월12일에 발족했으나 은행권은 종래의 「조선은행권」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동경지점에서 제조계획을 짜고있는 은행권은 8·15광복이래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그러고 한국은행 창립후 처음으로 발행되는 「한국은행」권이었다.
마땅히 충분한 시일을 두고 그 많은 뜻을 담아 도안을 고안하고 원도를 만들고 원판을 만들어 정성껏 인쇄해야만 될 은행권이었다. 그러나 본국의 화폐사정은 일각이 여삼추인데 도안에 구애되어 한시라도 시간을 천연할 형편이 아니었다.
김공사·김부총재·천병규(전재무장관)·동경지점장등 동경의 한국수뇌진은 구수협의결과 미술적 품위와 위조방지효과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선에서 도안을 간결하게 함으로써 원판을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간을 가능한 한 단축키로 했다.
그리고 「천원권」에는 마침 주일대표부 공사실에 걸려있던 한복차림의 이대통령 초상화를, 「백원권」에는 역시 주일대표부에 있는 책가운데에서 골라낸 광화문 사진을 쓰기로했다. 그러나 이것은 화폐의 「디자인」을 위한 구상에 불과했다.
이 구상에 따라 화폐도안 전문가가 「스케치」를 하고 이에 의하여 「디자인」을 하고, 「디자인」이 결정되면 그에 따라 원도를 그린 다음 원판을 만들자면 아무리 급히 서둘러도 1주일은 필요했다.
대전에 있는 나는 조바심을 참기 어려웠다. 「딘」소장이 대전에 와서 도청국방부장관실 옆방에 자리잡은후 나는 거의 매일 아침 이 방에 드나들었다. 이 방에서 듣는 정보가 가장 정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딘」소장방에는 동경과 연결된 군용전화가 있었다. 이 전화로 동경지점의 김부총재를 불러 은행권제조의 진행상황을 보고받고 최대한 급속도로 일을 추진하라고 독촉했다.
연세대학교의 「언더우드」 부사 둘째아들이 미군장교로 종군하여 「딘」소장 방에 있었는데 내가 전화를 거는 품이 몹시 급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다시 SCAP에 전화를 걸어 한은 동경지점의 한은권 제조를 적극 지원하도륵 당부했다. 이 전화를 받고 SCAP는 일부러 군인 1명과 군속 1명을 대전으로 파견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하여 내가 비행장으로 가서 두사람을 만나 이쪽 화폐사정을 설명하고 최대한으로 지원하여 은행권이 인쇄되는 대로 즉시 공수해주도록 신신당부했다. 이들은 타고온 비행기로 즉시 동경에 되들아가 일본내각인쇄국을 독촉하여 주야겸행으로 작업을 강행했다. 주일대표부와 동경지점직원들이 주야불식 뛰어다니고 인쇄소에 가서 감시 감독한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결과 예사로 일을 밀고 나갔다면 수개월이 걸려야 했을 은행권 제조가 불과 10여일만에 완성되었다.
일본에서 인쇄한 최초의 한국은행권이 미군용기로 김해비행장에 도착한 것은 7월13일이었다. 이날 도착한것은 「천원권」60억원, 현송책임자는 미군정시대에 조선식산은행두취(은행장)를 지낸 「해리·J·로빈슨」소령이었다. SCAP가 직접 수송을 담당했던 것이다.
은행권은 14일에도 「천원권」92억원과 「백원권」2억3천만원이 도착했다. 한은권 긴급제조를 명령한지 2주일만에 1백54억3천만원의 신은행권을 확보함으로써 전쟁수행을 위한 한국은행의 발권대책은 비로소 한숨을 돌렸던 것이다.
나는 은행권도착보고에 접한 7월13일 즉일로 최기총과 문상철을 부산에 파견했다.
이들은 피난민으로 가득찬 남하열차에 몸을 싣고 인파에 짓눌리며 무진 고생끝에 대구에 도착, 대구로부터는 무개화차(지붕이 없는 화차)를 타고 부산진에 도착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끌로는 도저히 시내에 들어갈 수 없어 이발을 하고 옷을 사입고 신발을 사신어야할 정도였다.
임시본부는 이미 대구로 이동했으므로 이들은 일본에서 도착한 은행권을 대구로 현송했다.
새로운 한국은행권의 발행은 금융통화위원회의 의결을 거쳐야한다. 그러나 부재위원이 많아 위원회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은행법 제고조에 의하여 전쟁발생시 총재에게 부여된 긴급조치권으로 7월20일 공고하고 7월22일 처음으로 한국은행권을 발행했다. 이리하여 사상 최초의 뜻깊은 한국은행권은 전쟁중 비상하게 제조, 발행되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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