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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교육 후 자유 준다"고 꾀어 집결시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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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사이공」 함락 전 월남의 많은 학생들이 미국에 유학했으며 장학생 선발은 월남문교부가 직접 관장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업]이라는 경찰 소령은 자기 딸을 미국에 장학생으로 보내려고 문교부를 찾아갔다. 문교부장관은 「티우」대통령의 이종 육촌형인[고각틴]이었으며, 그의 비서는 미모의 중년부인이었다.
「엄」소령은 자기 딸이 미국으로 건너가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몇 마디의 대화가 오고간 뒤 여비서는 『따님이 장학생으로 도미유학을 가게끔 해주겠으니 3천 [달러](미화)를 내십시오. 장관님께 올리는 사례금입니다. 따님이 미국에 가면 4년 간에 6천「달러」를 장학금으로 받게 되니 3[달러]를 낸다 해도 총 액수의 절반밖에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사이공]은 함락되고 왕년의 문교부 장관[고각틴]과 경찰소령 [엄]은[치화]형무소 H동 제2층 제2호실에서 서로 만나[룸·메이트] 되었다.
1974년10월 [사이공] 의「투도]가 171번지에<오대양>이라는 항공 표를 파는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에는「안토니」 [첸]이라는 중국인이 있었는데 돈 많은 부자였다.
하루는[사이공]부두에 있는 세관에 근무하는 과장이 2명의 부하 세관원을 거느리고 중국인 집을 급습하여 가택수색을 했다. 샅샅이 뒤졌으나 나온 것이라고는 별것이 없고, 미 본토불 2백[달러]와 어느 외국인에게 미 본토불을 주고 받아놓은 차용쪽지가 있었다.
세관과장은 그 쪽지와 2백「달러」를 압수해 가지고 돌아갔으며 그 다음날. 소환장이 발부되었다. 중국인 갑부는 소환장에 명시된 날에 세관에 출두하여 과장을 만났다.
과장은 외화를 불법소지하고 외국인과 거래한 것을 코에 걸고 귀에 걸면 10년까지 징역살이를 시킬 수 있으며 징역살이가 끝난 후에도 월남에서 장사를 못 하게 하고 외국으로 추방시킬 수 있다고 한 후 자기는「찬·티엔·키엠」수상의 직계 심복이므로 아무도 자기를 해임시킬 수 없으며 또 자기를 해임시키려고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부하를 시켜 암살할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중국인을 돌려보내면서 10년의 감옥갈이를 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눈감아 줄 터이니 2억[피아스타](약30만[달러])를 낼 것인지를 집에 돌아가서 잘 생각해본 후 내일 다시 출두하라고 했다.
중국인은 다음날 세관에 가서 두 번째로 과장을 만났다. 뇌물의 액수는4천만「피아스타」(약6만[달러])로 내려갔다.
이틀 후 중국인은 세관과장이 지시한대로 봉제완구인 큰 토끼 여러 마리의 뱃속에 현찰 4천만[피아스타]를 넣어 가지고 자동차에 싣고서 [파스퇴르]가에 있는「빌딩」으로 갔다. 거기에는 30대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중국인이 주는 장난감 토끼들을 받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 열거한 원인들에 의해 자유월남은 l975년4월30일 패망하고 북월 정규군 및 경찰에 의해 17도선 이남은 뒤덮이고, 남부월남 민족해방전선 군대는 북월군과 경찰에 흡수되고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웬후토]가 남부월남혁명 임시정부 주석이었으나 실제로는 북월에서 공산당을 끌고 내려온 [홤흥]이 당권을 손에 쥐고 쓰러져있는 자유월남의 사후처리 통치를 담당하고 있었다.
「홤흥」은 첫째의 긴급 과업으로[타우] 구정권 무장 세력을 제거하고 각계각층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제거하여 위험 잔재세력을 뿌리뽑으려는 비밀정책을 수립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남부월남 혁명임시청부의 정책은 자주. 민주. 평화. 독립. 중립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구정권 인사들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고 관대하게 대하겠으니 구정권의 군인.경찰.국회의원.정당인.고급관리.종교지도자.중견언론인.대학교수및 학생간부 등은 모두 등록을 하고 수주일간의 교육을 받으라고 했다. 이 교육이 끝나면 모두 자유시민이 될 것이라 공언했다.
장군에서 이등병에 이르기까지 구정권의 군인들을 포함해서 모두들 마음놓고 등록을 했다.
등록한 사람들은 등록 장에서 주는 종이에 명시된 날짜에 지정된 집결지로 갔다. 3주일간 쓸 수 있는 치약·잇솔·[노트]·연필·비누·모기장·담요·우의 등을 걸머지고 집결지에 모인 구정권의 군경을 포함해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군용[트럭] 또는 선박에 실려서 알려지지 않은 비밀 교육 장소로 수송되었다. 도착해보니 비밀교육장소란 모두 형무소이었다.
수개월 안에 약1백20만 명의 인원을 수용하자니 형무소가 모자랐다.
많은 인원이 북월로 수송됐으며 남월의 공공시설이 형무소로 많이 바꿔졌다. 이때에 수감된 인사 중에는 과거에 수상을 지낸 사람만도 3명이 있었으며 국회의원은 전원, 신문기자도 전원이었으나 과거에 「베트콩」비밀 [푸락치]로 활동한 사람만은 제외되었다.
[티우]정권에 반대하여 치열한[데모]를 한바있는 「틱트리·쾅」스님,「호앙·퀸」신부, 「탄」신부, [후에]신부, 「하이탑」장군, [찬반·튀엔]국민당수, [하투룽]신대월 당수 등도 이때 수감되었다.
이 당시 투옥된 인원중 전 수상「환휘·쾃」, 전 수장「손녹탄」, 「호앙퀸」신부, [틱탐·차우]스님 등은 모두 옥사했다.
1975년 하반기에 월공 당국은 남 월남 전역에 걸쳐 모든 국민들에게 개인신상진술서를 쓰게 했다. 이는 6세부터 시작하는 자기의 이력 및 사상배경, 장차의 포부 등을 기록하는 것이며 36개의 항목이 있어 처가. 친가의 8촌까지도 기록하는 상세한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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