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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례·허식의 폐습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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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나라의 오랜 폐습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의 하나가 허례허식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가정의례의 절차가 번거롭고 하객이나 조객에게 경제적·심리적 부담을 강요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초상 빚이 3대를 끈다』 느니 『딸 셋을 시집보내면 기둥뿌리가 빠진다』느니 하는 속담이 결코 옛날 얘기로만 들리지 않을 만큼 살림은 어려워도 결혼과 제위는 요란스럽게 치러야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일가 친척의 울타리 안에서 치러져야할 의식이 그 울타리를 벗어나 제3자에게 폐를 끼치고 허세와 낭비풍조마저 조정한다면 이는 반드시 뿌리 뽑아야할 폐습임에 틀림없다.
정부가 가정의례준칙을 정해 생활규범으로 지키기를 권장한지도 11년,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아 처벌규정을 달아 법률화한지도 벌써 8년째가 된다.
분수에 맞는 생활로 건전한 사회기풍을 조성하고 불필요한 허례허식을 말끔히 씻어버리자는 이 운동이 그 동안 거둔 성과를 과소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호화판 결혼식에서 호화분묘에 이르기까지 각종 허례허식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어떤 사람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혼수 비로 1억 원을 썼다는 소문이 났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시집식구들에 대한 호화판 예물은 물론이고, 「트럭」에 가득히 음식을 실어 보내 시가 측 손님들을 위한 잔치를 벌이게 했다는 따위 얘기를 우리는 흔히 들어왔다.
정도의 차는 있을지라도 분수에 맞지 않는 허례허식경향은 서민층도 마찬가지다. 신부의 손가락에는 값진 「다이어」반지를 끼워주어야 체면이 서고, 딸을 가진 부모들은 예물이 보잘 것 없으면 시가에서 구박받을까 빚을 내서라도 비싼 혼수를 마련하는 게 우리의 실정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리 나라에서 한해에 쓰이는 관혼상제 비용은 무려 2조원 가까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우리나라 GNP의 5%나 되는 것으로 미국이나 영국 등 선진국의 3%에 비해 근 두 배 가 된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형편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수준을 훨씬 웃도는 「체면유지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어느 분야 건 마찬가지겠지만, 허례허식이란 망국적 폐습을 일소하는데 솔선수범 해야 할 계층이 상류층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대체로 서민과 중류 계층은 상류층의 생활방식과 소비양식을 비판 없이 따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욱 지도계층인사들의 절제와 모범적 행동양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정부는 사회지도층인사들의 사치·낭비풍조를 없애기 위해 가정의례준칙의 위반 및 고급「호텔」 사교모임 등을 집중 단속키로 했다한다.
이 같은 방침은 최근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취해지는 것으로 보사부가 중심이 되어 시도 및 경찰 등으로 편성된 합동단속반 맡아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지도층의 가정의례준칙위반을 중점 단속한다는 말은 해마다 나오다시피 했고 적발되면 신문에 명단과 사진을 공개하겠다는 엄포도 그것이 대부분 용두사미로 끝나고 만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때문에 단속의 실효에 대해서 얼마쯤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심수습책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이번만은 엄포에 그치거나 엉뚱한 부작용 없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하고 싶다.
그러나 사치풍조나 호화판 가정의례를 근절시키는 길은 원칙적으로 단속의 차원이 아니라 정화된 사회의식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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