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유엔, 이라크 再建 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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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그다드 중심부에 서있던 사담 후세인의 거대한 동상이 무너졌으니 누가 이라크를 관리해야 할까? 미군이 바그다드에 들어가기 전부터 유럽연합은 "유엔이 중심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지난 주말 상트페테르부르크 정상회담에서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 戰後 코소보에서 일어난 일들

참 흥미로운 일이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놓고 "반전 외교에 나섰지만 미국과 영국의 전쟁 시작을 막지 못했던 세 나라가 이라크를 제 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에선 승전국들에 재량권은커녕 발언권조차 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사실 이 세 나라는 미국과 영국에 "당신들이 한 일은 잘못됐고 불법이다. 하지만 당신들이 이겼으니 우리는 이 불법 사업에 파트너로 참여하기 원한다"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영을 국제법 위반국이라고 비판하던 프랑스.독일.러시아가 왜 갑자기 함께 대의 명분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는 논리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진짜 이유는 힘이다.

유엔이 이라크를 떠맡으면 이라크전 발발 전 미국에 제동을 걸려고 했던 이 세 나라는 미.영에 대항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틀 속에서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부시 행정부가 이들 나라의 주장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파워게임과는 별도로 능력의 문제도 있다. 유엔이 정말로 인도적.정치적.경제적 재건 업무를 맡을 능력이 있는지, 유엔이 30년간의 전체주의적 통치가 계속돼온 폐허 위에서 제대로 돌아가는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여부다.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세르비아를 공습한 이후 코소보에서 벌어진 일들은 유엔이 '국가 재건'을 맡기에는 신통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럽연합.유럽안보협력기구(OSCE).유엔은 코소보 재건을 떠맡았지만 지난 4년간 재건은 별로 이뤄지지 않았다. 민주화에 관한 한 더욱 그렇고, 경제 발전에서도 별반 역할을 하지 못했다.

미국 민주수호재단의 스티븐 슈와츠는 "유엔은 사회주의자 관료들의 부활과 유지를 위해 가능한 모든 작업을 했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유엔이 제시한 사유화 관련 규제는 코소보의 전문가들로부터 "사유재산권을 촉진시키기보다 국가 재산의 국영 소유권을 강화하는 효과만 만들어낸다"는 반발만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라크 반체제 인사인 카난 마키야는 '공포의 공화국'이라는 저서에서 유엔 역할에 대해 역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랍의 나라들은 유엔의 이라크 관리자로 나서려 할 것이다.

이들 나라가 관리자가 되면 이라크는 아랍 정치에서 가장 저급한 공통분모에 의해 통치되는 꼴이 되며, 이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된다."

무엇보다도 유엔은 전후 이라크의 안전을 책임지기에는 적절치 않은 조직이다. 유엔은 자체로는 실권이 없다. 언제나 유엔 소속 국가들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누가 시아파나 쿠르드족의 권력 선점 경쟁을 막기 위해 자국 군대를 파견하려 하겠는가.

독일은 어떤 병력도 보내려 하지 않을 것이고 프랑스나 러시아도 그렇다. 질서를 회복하고 유지할 유일한 나라는 이미 병사를 보내 전투를 치른 미국과 영국밖에 없다.

*** 실권 없는데 안전 책임질 수 있나

전후 안정은 정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다. 역사상 가장 적절한 예는 코소보가 아니라 한국과 대만이다. 미국은 두 나라에서 안전 문제를 떠맡았고, 이들 나라 바깥 출신의 유엔 관료 대신 해당 국가의 기업가들이 경제 성장의 길을 밟도록 했다.

물론 급속한 경제적 근대화가 곧바로 민주주의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이승만이나 장제스(蔣介石) 같은 독재자도 있었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난 후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렸다.

패전국 독일과 일본도 유사한 사례다. 이들 나라는 모두 미국이 만든 안보 우산 때문에 번영했다. 이 같은 번영은 이라크에서도 다시 재현될 수 있다. 그러나 유엔의 후견을 통해서는 그게 아니다.

정리=채병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