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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 옮기며 신심 닦는 의식 「사경법회」 1,200년 만에 재현|동국대 불교문화 연구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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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불교 중요 신앙의식의 하나인 사경법회가 1천2백년만에 원래의 옛 모습대로 재현됐다. 동국대 불교문화 연구소(소장 김운학 스님)는 지난 26일 하오 동대학교정에서 78년말 국보로 지정된 『신라사경』에 나타나 있는 의식절차를 따른 「신라사경법회」를 재연, 오랫동안 우리 주위에서 잊혀져 온 전통 불교의식의 하나를 일깨워 줬다.
임시 사경원으로 정한 동국대학교 정각원-. 이날 법회에 사경을 신청한 1백여명의 사경사들이 정좌한 가운데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기 위한 일념의 기도를 올렸다.
의식의 첫 번째 순서인 「관정수」를 뿌리기 위한 청의동자 2명이 맨 앞에 서서 교정안의 불상을 향해 의식행렬을 서서히 이끌어 나갔다.
정각원을 출발한 법회행렬은 푸른 법의를 입은 청의동자(국민학교 5년생)가 길바닥에 맑은 물을 뿌리며 나가는 데서부터 본격적인 의식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법회의 의식행렬은 청의동자 뒤로 「기악사인」-「향수청신녀」-「산화 청신녀」-「법사」-「범패사」-「사경사」-「동참대중」의 순으로 이어졌다.
국악인 이인호씨와 3명의 스님으로 구성된「기악사인」은 각각 피리·호각·정·북을 연주했다.
한복 차림의 동국대 여학생이 대신한 청신녀 2명은 각각 향수와 꽃을 뿌리며 뒤따랐다. 이날 법회의 주인공인 법사가 향을 피운 향로를 정중히 받쳐들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일념의 발원 기도를 들이며 청신녀들의 뒤를 이었다.
동국대 불교대생 12명으로 구성된 「범패사」들은 일종의 독경인 범패를 창하고 법회사경을 신청한 1백여명의 사경사들은 각종 법의를 차려입고 생화를 손에 든 채 행렬의 뒤를 따랐다.
불상을 한바퀴 돌아 다시 정각원에 도착함으로써 의식행렬은 끝나고 사경에 들어갔다.
정각원에 정좌한 사경사들은 사경 대본으로 봉헌된『반야심경』을 앞에 하고 『물은 이 대자비와 지혜의 물이요, 먹은 능엄도정의 석묵입니다』로 시작되는 사경관념문을 조용히 외워 나갔다.
사경관념문은 먹을 갈면서 정신을 순화시켜 정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기도과정-.
그래서 먹을 갈 때는 사람이 먹을 가는 것이 아니라 먹이 사람을 가는 자세로 정중히 마음을 연마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사경에는 원래의 의식대로 먹을 갈지 않고 시중에서 판매하는 먹물로 대신했다.
사경관념문 봉송에 앞서 망설의비, 반야심경봉독, 대본봉헌 등의 의식이 행해졌다.
관념문 봉송에 이어 법회의 「하이라이트」인 사경이 시작됐다.
사경사들은 각자 창호지에 반야심경을 한자. 또는 한 줄씩 쓰고는 잠시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고 다시 계속해 내려갔다.
원래 아주 정성스럽게 하는 사경회에서는 집필에 앞서 깨끗한 백지「마스크」를 만들어 입김이 글자에 가지 않도록 입과 코를 가리고 쓴다. 또 글자 한자를 쓰고 3번 위불하거나 일행을 쓰고 3번 예불을 올림으로써 사경의 종류를 흔히 일자삼예경· 일행삼예경 등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사경이 끝난 후에는『지금 이루어진 이 경전이 미래세가 다하도록 없어지지 않기를 원한다』는 발원문이 사경사들에 의해 낭송됐고 사홍서원을 마지막으로 모든 사경회 의식이 완전히 끝났다.
동국대 불교문화 연구소는 이날 사경된 반야심경들은 모두 모아 연구소에 보관, 앞으로 새로 세워지는 사찰탑이나 불상의 복장품으로 넣기로 했다.
이날 봉행된 신라사경의식은 법회 행렬에 앞서 법당에서 오랫동안 올리는 재와 사경에 참가할 사람들에게 주는 보살계, 먹을 가는 과정 등이 생략된 것을 제외하고는 『신라사경』 기록대로 재현했다.
경전을 서사하는 불교의식인 사경은 기원전 서역과 중국에서 시작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경덕왕 때 사경의식이 성행했음이 최근에야 밝혀졌다.
78년 초 경주에서 경덕왕 때 화엄경을 서사한 『신라사경』이 발견되고 그 말미에 사경의 절차가 기록돼 있어 1천2백년만에 사경의식이 알려졌다. 묵서·금니·은니사경이 신라·고려 때에 크게 성행했고 그 결정판이 바로 『팔만대장경』으로 목판에 새겨졌다.
일본에서는 현재까지 사경이 하나의 불교신앙의식으로 일반 신도들 사이에서 널리 실시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이후 법회로서의 의식은 거의 사라져 그 절차조차 고증할 기록이 전혀 없다가『신라사경』의 발견으로 명맥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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