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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것은 각자의 성실성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어디 계세요?』
아침 신문을 읽다가 갑자기 적의를 품고 그(남편)를 소리쳐 부르니까 그는 양볼에 비누거품을 잔뜩 묻히고 『왜 그래?』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우리나라 치과의사들은 얼마나 실력들이 없는 거예요?』 품었던 적의를 더 날카롭게 곧추세우고 힐난조로 따지는데도 그는 요만큼 동요도 없이『왜?』라고 아주 간단명료하게 되물었다. 그는 치과의사인데도 말이다.
『신문도 안보세요? 이빨 치료를 외국까지 나가서 하고 있잖아요? 우리나라 치과의사들은 몽땅 다 실력이 없는 엉터리박사들이예요?』 자존심 상할만한 말에도 그는 대답대신 피식 웃어버리고 하던 면도를 계속하였다. 오늘아침 나하고 주거니받거니 말다툼할 의사가 전연 없는 눈치다.
아침 밥맛이 통 나질 않았다. 글이라는 걸 써야 하는 날은 으례 이른 아침부터 신경이 곤두서기 마련인데 오늘 아침은 최고로 엉망이다. 50만원을 잃고 돌아온 아들과 그 어머니와 가족들의 아픔을 그려내야하는 대목인데 이게 영 껄끄럽게 나가지질 않는 것이다.
왜일까?
잠시「볼펜」을 던지고 곰곰이 따져 생각해 보니까 이것이 순 아침에 잡친 기분 탓이라는 결론이 나고 말았다.
나는 그만 기가 막혀서 나 자신에게 경고하기를, 무슨 상관이냐! 남이야 어디가서 이빨을 마쳤든 신경쓸 바가 아니지 않느냐. 앞 이빨은 일본가서, 송곳니는 영국가서, 어금니는 미국가서 고친들 어떠하냐. 그것과 글속에서 잃어버린인 50만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스스로는 준엄하게 몰아세우고「볼펜」을 다시 쥐고 대들었으나 역시 아니다.
참 알수 없는 일이다.
그만 다시 죄없는「볼펜」을 던지고 저 먼데 거리로 나가볼 채비를 차렸다. 서민의 애환이라는걸 그려보겠다고 가끔씩 찾아가 보았던 저 서울 끝 변두리 가슴시린 동네 거리로.
그러나 봄은 다행스럽게도 차별없이 거기 끝동네에까지 고루고루 포근포근 내려와 있었다. 가슴시린 이동네에 차별없이 봄이 내렸다는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군고구마통을 신식으로 개조해서 재작년 겨울부터 재미를 보았노라던 박씨 아저씨는 오늘 보이지 않는다.
겨울과 함께 자리를 뜨신 모양이다. 「텔레비전」에서 군고구마를 너무 싸게 팔아대는 바람에 당신 장사에 지장이 많노라고 점잖게 나무라시던 분.
봄이 되면 솜트는 일이 제법 들이닥쳐 수지를 맞춘다더니 오늘따라 솜틀 집은 문이 잠겼다. 25도로 기울어진 낡은 간판만 남겨두고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은 아닌가? 지난 가을까지도 제법 눈에 뜨이던 잡종 강아지들이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긴긴 겨울, 물가고에 휘어진 몸들 보신하느라고 없앴나? 그러면 올 여름 봄날엔 아래 윗동네 개서리도 할 수 없을테지. 그러나 겨울보단 여름이 훨씬 낫다.
숨을 몰아쉬며 꼭대기 꼭대기로 산비탈 동네를 자꾸 오르는데 봄 햇살 아래 옹기종기시든 채송화처럼 모여 앉은 동네아낙네들이 건너집, 그 건너집 흉들을 열심히들 보고있다.
아,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그들이 지난 겨울을 무사하게 보냈다는 사실은.
해가 손에 잡히는 산성에 올라 판자집의 바다를 내려다본다. 거기 아우성처럼 총총히 꽂혀 역시 바다를 이루고 있는 「텔레비젼」 「안테나」의 숲.
나는 문득 지난 1년 동안 저「안테나」에 무엇을 보내주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아무 것도 보낸 것이 없는 것 같다. 처음에는 용기를 주리라 결심도 했었고, 겁나게 고발(고발이 최선은 아니지만)하리라 두주먹 쥐고 순진하게 맹세도 했었는데…. 그런데, 아무 것도 못한 것같다.
「텔레비전」 이란 그런 거지 뭐- 노인네 같은 변명도 해본다.
그러나.
그러나 걱정을 말자. 우리들 곁에는 국민이 원해서, 그리고 국민을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가 돼있다는 수많은 인사들이 두 주먹을 부르쥐고 있지 않느냐. 그리고 이미「영세민 생활보호입법 추진」이라는 반가운 소리도 신나게 들려왔다.
그것이 표절이든 아니든, 아뭏든 반가운 소식이 아니냐.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우리가 더 착실하게 믿어야 할것은 자기 자신의 성실성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디선가 애국가가 청명하게 들려왔다.
이러나 퍼뜩 빈 원고지를 생각해내고 황급히 해가 떨어져간 판자집의 바다를 헤엄쳐 헤엄쳐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왠지 부끄러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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