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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0)영오 6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65년부터 70년까지를 우리나라 영화사에선 전성기로 꼽는다. 이 기간동안 제작된 편수는 모두 1천1백73편.
이것을 연도별로 따져보면 65년에 1백61편, 66년에 1백72편, 67년에 1백85편, 68년에 1백95편, 69년에 2백29편, 7o년에 2백31편이다.
물량으로만 볼 때엔 과연 세계적이며 전성기라 할 만큼 대량 제작이다. 그러나 이 기간을 단순히 전성기라고만 추켜세우기엔 약간 괴의적이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오히려 혼란기라고 해야 타당할 것 같다. 「영화문화」란 「영화예술」「영화기술」「영화기업」이 합쳐져야 비로소 예술로 볼 수 있는데, 이 기간의 우리 영화는 기업만을 목표로 양산되었으니 그것을 과연 문화적인 현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시 서울의 개봉관은 5개소. 이 좁은 시장을 겨냥해 한해에 2백편에 가까운 영화가 쏟아져 나놨으니 당시 영화계의 혼란을 짐작할 수 있다.
당국은 영화사를 정비하고 외화의 수입 편수를 조절하는 등 영화계 정화에 노력했지만 헛수고였다.
영화제작업계는 대명제작이 성행했고 외화「쿼터」가 이권화되는 등 정부가 보강한 권리를 악용함으로써 영화계의 난맥상은 더욱 복잡해져만 갔다. 특히 외화수입 편수를 전체 국산영화 제작편수의 3분의1로 한다는 당국의 방침은 외화 「쿼터」를 얻기 위한 운산현상을 더욱 부채질했다.
성산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질의 저하였다. 이 기간에 개봉된 상당한 편수는 예술작품이라기보다 단순한 상품으로밖엔 볼 수 없는 저질영화들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무비판적으로 저질영화가 쏟아져 나온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꼭 한가지, 동시녹음제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의 책임은 물론 1차적으로 제작자에게 있지만 영화 정책에도 일단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외화 「쿼터」가 걸려있는 정부주관의 영화상에 만이라도 동시녹음영화여야 한다고 규정했더라면, 영화제작자들은 너도나도 동시녹음 영화를 제작했을 것이다.
영화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나을 시기에 한국의 인기배우들은 5, 6편 겹치기 출연이 예사였고 그것을 흡사 인기의 척도가 되는 것처럼 명예롭게 여겼다. 그러나 냉철히 생각해볼때 그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배우들을 「카메라」앞에서의 한갓 흉내쟁이로 만든 것이 바로 후시녹음이란 제작방식이다.
65∼70년 사이 주연급의 목소리만 단골로 맡아 음성을 넣던 성우들이 있었다.
염석왕 박영민 이창환 고은정 정은숙 남해연 김소원 간선녀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연기자들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찍부터 동시녹음을 했더라면 우리 영화계의 혼란은 없었을 것이며, 지금쯤 우리 영화는 세계와 어깨를 겨룰 수 있을 만큼 꽃피웠으리라 믿는다.
후시 녹음을 해놓고 입이 맞나 안맞나에 가슴 죄면서도 동시녹음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제작비 때문이다.
후시녹음보다 평균 2∼3배가 더 드는 제작비에 제작자들이 선뜻 용기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는 무성영화 시대의 방식으로 촬영한 뒤에 녹음하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이 출연한 연기자의 목소리가 아닌 성우의 목소리로 하게 마련이다.
이런 낙후성 때문에 우리나라 영화는 국제영화제에서 번번이 실격하는 창피를 당하고 있다. 내용이 지니고 있는 예술성은 덮어두고라도 동시녹음이 아니기 때문에 예선에서 떨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동시녹음이 아닌 영화에서는 생명감도, 「리얼리티」도 찾아볼 수 없다. 당국이 누누이 강조하는 국산영화의 진흥, 해외시장 진출, 국제영화제 입장은 동시녹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국산영화의 동시녹음은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돼야 한다. 당국은 강제라기 보다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 동시녹음을 당연히 강행시켜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제작자들이 이에 적극 호응한다면, 우리나라 영화도 세계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혁신적인 계기가 마련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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