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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류정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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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민서로가 신뢰회복을
옛날에 「이덕위정」, 혹은 「덕정개선」이라 하여 덕으로 하는 정치를 왕도로 보고 법으로만 다스리는 것은 패도라 일컬었다.
오늘의 상황이 아무리 난세이고 위기라 하더라도 치자의 도리는 다를 바 없다.
정치에 있어서 도덕을 얘기하는 것은 단순히 인심을 휘어잡는 면보다 하늘을 감동시키는 높은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나 국민은 「10·26」이후 공통의 정치 상황 속에 놓였고 이를 잘 헤쳐 나가기만 하면 낙원이 있고 그것에도 달할 때 역사 속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그런데 「10·26」후 국민들간에 무언가 불안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고 안보 면에서 걱정들을 하지만 민주화가 과연 잘 될 것인가에 일말의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럴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정부와 국민, 여와 야, 군파 민간, 그리고 국민상호간에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송나라 때 문천저의 글귀에 『유설도림사』(육체는 말을 안 듣지만 혓바닥은 살아있다)라는 것이 있었는데 내가 그 꼴이 되었다.
청와대가 바라보이는 누상동 우거에 수년간 파묻혀 지내면서도 무언가 귀에 거슬리는 얘기만 하곤 싶으니 천성이라고나 할까.
혹자는 그것을 「야당성」으로 볼지 모르나 나는 지금 무욕이요, 무색이라는 것만 전제해 둔다.
최규하대통령이 취임 후 첫 번째로 가진 기자회견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주의 깊게 지켜본 것 같다. 나도 최대통령의 얘기 가운데 기대하는 것이 한가지가 있어서 끝까지 「텔레비전」을 끄지 않고 경청했다.
기대하던 대목은 다름 아닌 사면과 복권이다. 지난날 정부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금료옥조로 삼았던 긴급조치는 해제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옥에서 풀려 나왔다.
개헌, 졸속·지연 모두 지양
그 긴급조치는 과연 우리 국민에게 무엇을 주었으며 누가 그 긴급조치를 다루어 왔던가. 이런 것들을 모두가 생각하고 있을 줄 알았다.
영광스럽게도 나는 최대통령과 동경고보 동문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겠는데, 『복권을 검토하겠다』는 말은 적이 실망을 주었다.
최대통령은 본래가 덕인이고 그 풍채에서 믿음을 주는 분이다. 그렇기에 내 기대가 더욱 컸는지도 모른다. 「쾌남아」라는 칭호를 하나 더 붙여 주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바닥을 고르게 해놓은 후 씨앗을 뿌리는 것이 순서다. 헌법을 고치고 선거를 하는 것은 그 후의 일이어야 한다.
헌법개정작업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정부의 성격이 과도정부라고 해서 어느 정당이 고삐를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정부입장에서 볼 때는 국민도 생각하랴, 각계 각층의 의사도 배려하랴, 우방도 고려할라치면 많은 분별이 필요할 것이다.
실로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것은 중대한 과업이다.
결코 졸속하게 처리할 일이 못된다. 졸속할 일이 따로 있고 순서를 잡아서 할일이 있는 것이다. 헌법작업은 시간을 너무 끌어서는 곤란하지만 쫓기는 형세처럼 서둘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좀 고생하더라도 진통과 혼란을 극복해서 나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빠를수록 좋다고 보는 것 같은데 바탕을 마련하지 않고 조급하게 줄달음치려고 해서는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다.
너무 건방진 짓인 줄은 알지만 나이를 조금 먹었다는 것을 들어 정치하는 분들에게 한마디 하고싶다.
지금 같아서야 국민 누가 그들에게 표를 주겠는가. 여당에 줄 수가 있겠는가, 야당에 줄 수 있겠는가. 표를 줄 곳이 없는 게 국민들의 고민이요, 슬픔이다.
어느 재야인사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한국국민은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야속하다고 할지 모르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나라 국민이 그렇게 수준 높은 것도 아니고 가장 딱하게만 여겨진다.
정당과 정치인은 신뢰를 회복해야만 한다. 최근 공화당과 신민당에서 각기 정풍 운동이니, 신풍 운동이니 하는 숙정 움직임이 일어났다고 하여 가만히 지켜보니까 까닭이 붙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고무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잘못을 저질러온 사람은 각성하고 새롭고 유능한 사람이 참여하는 정계 개편도 이룩하면서 민주회복의 길로 나아 가야한다.
한쪽 억압 없이 인격존중
그렇지 않고서는 정당과 정치인이 국민들에게 표를 달랄 염치가 없을 것이고 줄 국민도 없다.
국민에게 자격이 있다는 덕담도 나쁠 것은 없지만, 그에 앞서 지도자들이 깊이 생각하여 옳은 방향으로 국민을 인도해 나가야 한다.
국민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같은 것이다. 지도자가 귀감이 되는 자세를 보이면 내나라, 내 자손을 위해 일체감을 가지고 따를 것이다.
학생과 종교인들에 대해 나는 늘 경의를 표해왔다. 내가 세상을 조금 먼저 살았다지만 그들은 나보다 훨씬 앞질러 생각하고 그렇게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뒤따라가기에 바쁠 정도다.
일본에서도 과거 학생문제 때문에 대학 문이 자주 닫혔다. 그래도 곧 정상화되었던 것은 인권과 인격이 상호 존중되었기 때문이다. 자기편이 아니라고 탄압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쪽이 굴복되고 어느 쪽은 억압하는 일이 없이 인권·인격이 존중되어야겠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자유가 좋은 것이라도 책임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 자유스런 언론을 구사해 보지 못했다. 책임을 다 하면서도 자유가 보장되는 언론을 가져보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다.
모든 사람의 반성을 불러일으킨 대통령 시해사건을 계기로 언론도 무엇인가 큰 자각이 있어야 한다. 흰죽 갓둘레 먹는 식으로 변죽만 건드리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한다. 애들은 매가 무서워 울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
언론이 변죽만 울려서야
누구나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나도 남북대학 문제에는 각별한 관심이 쏠린다. 이 문제를 굳이 거론하는 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기 때문이다.
중공부수상 등소평이 「브라운」 미 국방장관에게 「워싱턴」-평양 대화를 거론한 대목이 그것이다. 평양 쪽 속셈이 알려지지 않는 한 대화의 실현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일본사람들간에는 『적은 본능사에 있다』는 말이 있다.
이 고사를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으나 먼 곳보다는 가까운 데를 중시하라는 식으로 생각하자. 적은 분명 북녘에 있는데 남쪽에서 혼란이 생긴다면 돌이킬 수 없는 갈망으로 가게 된다.
『암은 몸밖이 아니고 몸 속에 생긴다』는 이치라고 할까. 모든 사람이 애써서 훌륭한 것을 마련해도 몸 안에 암 조각이 하나라도 생기면 헛수고가 된다.
누구나 4, 5월의 사회혼란을 예상하고 권력형 부패다, 강력범이다, 악덕기업이다…해서 시쳇말로 부조리를 걱정한다. 여기 저기서 질서개편의 소리가 나올 것인데 그 혼란을 겪지 않고 편하게 사회질서를 잡겠다면 오히려 거기에 무리가 개재할 것이다.
이런 혼란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정치」라는 것이지만 정치는 교육을 통해야만 한다. 나라의 장래는 교육이 좌우한다는 오랜 생각에 변함이 없다.
윤제술(76·전 국회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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