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의미 새롭게 일깨워 줘 『쓰러지는 빛』 | 상징성과 실체 적절한 조화 『겨울비행』 | 「모국어」의 뜨거운 사랑 묘사 『나비수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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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본심에 올려진 작품은 모두 22편이었다.
소설을 쓰는 일이 일면 새로운 삶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새 인물의 창출 작업이라면 22편의 작품을 읽는 동안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인물다운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성한 말들의 성찬 속에 제 모습을 지닌 인물의 자리가 마련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을 아쉬워하면서 마지막 논의대상으로 추려진 작품이 『겨울비행』(안영옥)·『나비수렵』(김경전)·『쓰러지는 빛』(최명희)등 3편이었다.
이중 『겨울비행』은 언제나 떠남만 있고 진정한 토착이 없는 주인공(스튜어디스)의 삶의 상징성과 그 실체가 적절하게 잘 조응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으나 그 직업이 지닌 상징적 의미에다 자기 삶의 실체를 너무 가볍게 떠얹어버린 아쉬움 때문에 먼저 제외되었다.
다음 『나비수렵』에서는 무엇보다 이 작자의 모국어(혹은 겨레나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채집과 수렵으로 대비시킨 우리말에 대한 사랑의 상징도 각별히 힘이 있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 작자는 그가 지닌 우리말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비해 그 사랑의 방법에 충분히 능숙치가 못한 것 같다. 사건에 쫓기다 「디테일」을 잃어버린 바쁜 문장이 소설의 뼈대를 너무 거칠게 드러내 버린 느낌이다.
사랑이나 아픔의 근원을 탐색해 나가는 소설의 방법은, 이를테면 환부를 까벌려내서 잘라내고 꿰매는 식의 외과적 진료가 아니라 숨겨진 환부를 밖에서 찾아내고 끈질긴 투약과 기다림 속에서 그것을 치유해나가는 내과적 진료의 그것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바로 말의 아낌, 자기 말과의 싸움에서의 끈질긴 인내심과 상관된다. 『나비수렵』이 사건을 쫓다 자기 인내의 끈을 놓치고 있다면 『쓰러지는 빛』은 오히려 지나치게 섬세한 감정의 밑바닥을 더듬다가 말의 긴장을 잃어가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감상을 응시하듯 차분하고 따뜻한 작자의 목소리에 도움을 받아 그 아픔을 끝끝내 안으로 안고 견디어 나간다. 그 위에 이 작품에서는 이미 길들 곳을 잃고 떠도는 삶에 길들여진 우리들에게 그저 「공간」이 아닌 삶의 「장소」로서의 집, 혹은 삶의 뿌리로서의 집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주고 있는 은밀스런 시선도 잘 드러내고 있다.
결국 그 소재로 수확해낼 수 있는 가능성 안에서 그 나름대로 이미 열매가 익어 고개를 숙여버린 조촐한 결실을 평가하여 『나비수렵』을 미루고 『쓰러지는 빛』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다만 집에 대한 이 「사소한」 이야기가 이 작가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기억할만한 체험이 아니기를 바란다. <유종호·최인훈·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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