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분설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올 겨울엔 분분설일이 잦다.
서울의 노변에 눈이 덮인 것도 벌써 몇 차례나 된다.
지난 정초에도 눈이 내렸었다. 예로부터 이 무렵에 오는 눈은 서설이라 했다. 희설, 쾌설, 감설이라는 말도 있다. 눈은 언제 보아도 우리 마음을 흐뭇하고 청순하게 해준다.
어떤 작고 시인은 눈이 오는 날이면 흰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고 싶다고 노래했었다. 자연에 묻혀 적요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눈이 펑펑 내리면 정말 그럴 것도 같다. 요즘은 그런 생활의 여유랄까, 멋을 잃고 사는 것이 못내 아쉽다.
눈이 오는 날이면 서울과 같은 도회지에선 오히려 비명이 높다. 흰 눈은 어느새 검댕으로 바뀌어 질퍽거리고, 아니면 미끄럼 판이 되어 모래나 연탄재의 세례를 받는다.
한길마다 밀리는 자동차의 행렬, 시민들의 역정. 눈이 구박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새삼 도시의 비정을 느끼게 된다. 집 앞에 눈이 쌓여도 빗자루를 들고나서는 손길을 보기 드문 것도 그런 세속의 하나인지.
이웃에의 무관심, 자연에의 무감각. 대저 현대인의 생활 「리듬」은 이처럼 메마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눈이 내리는 정경마저 볼 수 없다면 우리의 겨울은 얼마나 춥고 지루하겠는가. 4계의 변주 속에 사는 우리는 그만큼 천행을 받은 것도 같다. 한겨울에 백설천하를 바라보는 그 상쾌한 감흥은 사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모처럼의 청결이며, 모처럼의 풍요이며, 또 모처럼의 정밀이 아닌가.
눈이 오는 날이면 총성도, 증오도, 범죄도 없을 것만 같다. 온 천하는 그대로 평화이며, 그대로 미소인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비록 환상일망정 우리는 일상 중에 이만한 감성에도 굶주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득 눈을 크게 떠보면 이 지상엔 아직도 전쟁과 죽음과 아우성이 멎지 않고 있다. 요즘 소련 「탱크」에 짓밟히고 있는 「아프가니스탄」도 눈이 내리는 한겨울이다. 자연은 변함없이 오고 가지만, 그 땅위엔 하루도 눈과 같은 결백, 눈과 같은 화평이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정초에 희설을 보았지만 올해가 희사의 해이리라고 장담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자연도 세사의 발길에 쫓기는 탓일까. 우리가 자연을 잃고 사는 것은 도시의 번잡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 마음의 메마름, 세속의 차가운 숨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분분백설이 서설, 희설, 쾌설이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