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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다시 볼수없는 명플레이|사라진 「스타」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70년대도 물이 흐르는 자연의 섭리처럼 「팬」의 환호와 갈채속에 정상자리에서 애환을 던져줬던 숱한 「스타·플레이어」들이 떠나갔다. 이들중 더러는 지도자로 변신, 아직도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스타」들의 화려함은 다시 볼수없다는 점에서 향수마저 일일으키게 하고있다.
70년대초 청룡의 명수비라는 김호와 김정남의 멋진 「콤비」도 사라졌다. 김정남은 대표「팀」과 포철「코치」를 거쳐 현재 고려대에서, 김호는 모교인 동래고에서 후진양성을 하고있다.
7백여회의 국내외 경기에서 통산 3만여점의 득점을 「마크」, 「득점기계」라던 농구의 신동파도 74년2월 땀젖은 「유니폼」을 벗었다.
그는 기은「코치」를 거쳐 현재는 태평양감독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69년과 70년의 두차례 「아시아」 남자농구선수권 대회에서 한국남자농구를 「아시아」 정상에 올렸던 김영일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비명에 간 것도 70년대에 일어난 아픔이다.
고김영일씨는 76년5월23일 광주에서 벌어진 제31회 전국남자농구선수권 대회에서 한은감독으로 출전했다가 이마·머리 등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채 철로에서 숨진 시체로 발견됐었다.
71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타격·타점상과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던 박영길도 「롯데」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됐고 75년6월7일「불꽃의 사나이」라던 「와지마」에 7회KO승, 적지에서 처음으로 KO승을 만들고 「프로·복싱」 WBA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이 됐고 동양「타이틀」을 21차 방어한 유제두도 「글러브」를 벗은것이 70년대다.
73년 「유고」 「사라예보」의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와 함께 한국여자탁구를 세계왕자로 만들었던 침착하고 화려했던 수비로 각광을 받은 정현숙은 77년4월에 여자의 본분으로 돌아갔다.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의 3관왕인 역도의 원신희는 77년 은퇴후 체육관을 열었고 70년과 74년의 제7회「아시안·게임」의 투포환에서 2연패한 「아시아」제일의 역사이던 백옥자는 「피아노」점을 차렸다.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이름에 은자가 있기 때문에 은「메달」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뒷얘기까지 낳았던 장은경은 유도학교 조교수로 지도자가 됐고,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도 「코치」강습회등에 나가 수영발전을 위해 일하고있다.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여자배구에서 한국구기사상첫 동「메달」을 획득, 쾌거를 올렸던 주역 조혜정 유경화도 떠났다. 이중 조혜정은 배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탈리아」 「프로·팀」에 입단했다. 또 「몬트리올·올림픽」 1백여일을 남기고 대표선수자퇴를 선언,파문을 던겼던 공격수 박인실도 여교사가 됐으나 지난3월 교단을 떠났다. 【조이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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