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행엔 성공하고 남은 건 공허|김호선<영화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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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사람들 발길이, 표정이 가볍고 희망에 차 보인다.
「팬터마임」하는 연극배우와 같이 앓던 가슴이, 구겨진 몸짓들이 제 소리를 가지고 터져 나온다.
10여년 조감독 생활을 거쳐 70년대 초에 감독 「데뷔」를 했던 나의 영화적 성공은 더 두고 봐야할 일이지만 흥행적 성공은 비교적 한 편 이었다. 77년도에 만든 영화 『겨울여자』로 서울 개봉관 한곳에서 만도 60만이라는 한국군대와 맞먹는 관객을 동원해 방화 60년의 「톱」의 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웃지 못할 「난센스」는 나의 생활이다.
제작비의 20분의 1도 안돼는 연출료로 「시나리오」 「헌팅」 편집 진행비 따위로 재투자하다 보면, 한 작품이 완성될 때 즈음해서는 빚잔치하기 바쁘다.
집에서는 핏기 가신 아내의 원망에 찬 눈초리만 기다릴 뿐이다.
제작자는 영화인이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에 불과하다. 그런데 영화법은 자본주만 배불리고 영화인은 굶기고 있다. 영화인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영화법이었어야 할텐데 뭔가 대단히 잘못 되어있다.
해마다 제작자에게 주어지는 우수영화 보상(5억상당)에 대한 외화수입 「쿼터」 배정 때면 한결같이 이 따위 이율배반적인 법을 만들어 놓고도 큰 행사나 치르듯 목에 힘을 주는 문공당국자나 우쭐대는 제작자들 그늘에서 우리 영화인은 원망과 실의에 찬 눈초리를 보낸다.
근래에 완성한 나의 신작 『죽음보다 깊은 잠』을 검열을 마치고 개봉했다.
이 검열기관이 문공부에서 민간 심의체로 넘어 오게 되자 나 자신은 물론, 전 영화인이 해방된 기쁨 만큼이나 기뻐했다. 과거 문공당국의 검열은 독재자의 혀만큼이나 무서웠고 그 무자비한 가위질은 창작인의 의식을 마비시켜 놨다.
그런데 이 검열기관이 민간기구로 이양되고 나서부터 가일층 그 횡포가 심해졌다는 사실이다.
어느 심사위원이 「에로티시즘」의 영화를 검열하는 자리에서 자기 자식들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가차없이 「필름」을 자르더라는 웃지 못할 「난세스」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심사위원은 자신이 공인임을 망각하고 자기 가족 이기주의에 편견을 가졌던 것 같다.
우리는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살수는 없다. 역사의식과 혼돈하지 말라. 대중은 보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하며 말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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