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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클라우제비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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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수행되는 정치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철학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32년 8월이었다.

탁월한 전략가이자 전쟁철학자로, 현대 군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오늘날에도 진가가 떨어지지 않는 개념과 전쟁철학들을 일찍부터 설파했다.

전쟁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선구적 탐구는 상당 부분 나폴레옹 전쟁에 얽힌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됐다.

독일 부르크 출신으로 12세 때부터 군인이었던 그는 나폴레옹 1세와 유럽 국가들 간의 전쟁에 1812년 이전에는 프로이센군으로, 그 후 워털루전쟁 이전까지는 러시아군으로 참전했다. 그가 러시아군의 일원이 된 것은 1812년 프로이센이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으면서였다.

일찍부터 프랑스혁명에 대한 간섭전쟁에 참여했던 그는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 크게 실망, 나폴레옹에 대항한 유럽의 마지막 전제왕정국가 러시아로 가, 나폴레옹군과의 대혈전에 참여한다.

현대 전쟁이론의 기초를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전쟁론'(Vom Kriege)은 그의 이러한 개인적 경험을 정리 분석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특히 혁명 후 러시아의 공산주의자에게서 클라우제비츠가 주목을 받은 것은 전쟁의 본질에 관한 그의 탁견뿐 아니라 나폴레옹과 러시아군의 교전에 관한 그의 전쟁론이 갖는 현실적.공간적 적합성 때문이기도 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철학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레닌과 엥겔스는 특히 군사행동 및 군을 지배하는 정치우위론 개념에 주목했고 비스마르크는 군비확장론에 주목해 철혈정책의 단초를 밝힌 1862년의 의회연설의 사상적 기초로 이를 활용했다.

나치즘을 연구하는 일부 학자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 철학의 뿌리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철학에서 찾기도 한다.

1951년 미국 육사는 '클라우제비츠 .조미니 .슐리펜(Clausewitz, Jomini, Schlieffen)'이라는 책자를 발간,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철학이 어떻게 비스마르크의 철혈철학(鐵血哲學)과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연결되는가를 설명하기도 했다.

미국은 전세계의 반전 여론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의 잠재적 위협을 외교적 수단으로 제거할 수 없어 군사행동에 나선다며 사실상 단독 전쟁을 벌였다. 비스마르크는 1862년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김석환 논설위원